순국 독립운동가 애국가도 지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은 1902년도에 아내 이혜련과 함께 미국에 건너갔다. 망망대해 갑판 위에 올라 하와이섬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대한독립의 희망을 느껴 아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은 교포들 집집마다 청소부터 지도했다. 미국, 일본사람보다 더 깨끗이 살아야 한다고 지도했다. 불결하던 한국사람 집집을 깨끗하게 청소 지도한 사람이 25세 안창호 청년이라는 말에 이웃 미국 일본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훌륭한 지도자라고 칭찬했다. 위기의 조국을 덕육 체육 지육 3육교육으로 건지려고 교육학 전공차 도미 유학 온 도산은 무지한 교포 지도를 위해 유학공부는 포기했다. 귤 하나를 따도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라고 교포지도하는 도산은 노동현장에 뛰어든 노동자가 되었다. 교포지도를 위해 도산은 직업이 필요했다. 미국 신문에 청소부 구하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미국인 집주인은 큰 집을 청소해 주면 8불 주겠다고 했다. 하루종일 열심히 청소를 다하고 주인에게 청소검사를 해 달라 했다. 주인은 집 안팎을 다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변소문을 여는 순간 주인은 “원더풀” 부르짖으며 청소를 시킨 청소부 중에 가장 모범 청소를 했다고 칭찬을 했다.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훌륭한 신사입니다”라고 말하며 도산의 인격을 높혀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 국적을 물을 때 한국이라 대답하고 한국 사람은 그렇게 청소 잘 하느냐고 물을 때 한국사람은 청소 잘 하는 깨끗한 민족이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주인은 “나 안 선생과 8불 약속했지만 보너스 4불 더 드리겠소”하며 12불을 기쁘게 지불해 주었다. 청소를 책임감 있게 잘하여 짚신나라 한글겨레를 빛낸 도산과 헤어질 때 집주인은 “아참 안선생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에 또 필요할 것 같소 연락처를 적어 주시오” 정중히 말했다. 도산은 주소를 적어 주고 필요하면 또 불러 달라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달쯤 되었을 때 미국 집주인 엽서를 받았다.
“안선생이 깨끗이 청소해 주신 우리집 용도는 살림을 하든지 교육도장으로 쓰든지 묻지 않겠소 집만 잘 관리해 주시오”의 핵심글이 적혀 있었다. 도산은 그 집을 교포교육 도장으로 활용했다. 어느날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인삼장수 두 사람이 서로 자기 인삼구역을 침범했다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상투잡고 미국 사람들 구경하는 가운데 싸우는 추한 모습을 본 도산은 “당신들은 나라밖에까지 와서 나라의 수치를 보이느냐” 호되게 꾸짖어 주며 싸움을 말린 일이 있다. 이런 무지의 교포들을 회개시켜 애국심을 길러 독립의 일꾼으로 교육하기 위해 도산은 자신이 깨끗이 청소한 미국인 큰집을 학교처럼 보람차게 활용했다. 도산은 21세 때 교육으로 나라힘을 기르기 위해 평양 근처 남녀공학점진학교를 세우고 1908년 9월 26일 평양에 대성중학교를 세웠다. 이어 지방색을 없애기 위해 8도 대표를 뽑아 무실 역행 충의 용감 4대정신으로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을 조직했다. 중국 남경에는 동명학원을 설립했다. 이렇게 국내외 동포를 건전한 독립 인격체로 교육하여 독립 일꾼을 양성하여 1907년 3월 평양에 가서 4계절 배경으로 지은 애국가를 당시 2천만 동포가 다 불러 완전자주독립을 이룩하자는 것이 도산의 혁명적 교육입국 사상이기도 하다. 숙박비와 수업료도 면제해 주는 구세학당 <일명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에 귀의했다 무지한 교포교육 때문에 교육학 전공 유학을 포기한 도산은 2013년 11월 8일 스승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연세대학교 명예졸업자가 되었다. 탄생 135년 서거 75년만의 영예이다. 청소 잘하여 나라 겨레를 빛낸 도산은 광화문 새문안교회 대표 모범 성도요 순국애국자로 짚신나라 만고의 거울이 아닐 수 없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