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시대 교회 청년 대학생들의 여름나기
교회 수련회 시즌이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영아부에서부터 유소년 청장년 노년의 전교인 수련회까지 정겨운 계절이 돌아왔다. 나라가 없었던 일제시대 한국교회 청년들의 여름방학 나기, 그 모습은 어땠을까.
요즘 대한민국처럼 교육열이 뜨겁고 대학 진학자가 많은 나라도 없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전혀 달랐다. 해방 직후 나라를 새로 세워야 하는데 전 국민의 80% 내외가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던 사실을 미루어 일제시대 형편을 짐작해본다. 당시 대학생이라고 하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더구나 여대생이라고 한다면? 그 선망과 흠모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김활란, 김필례와 함께 대한기독여자청년회(대한YWCA)를 창설한 유각경은 해방이 되고 나서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의문을 내비친 일이 있다. 고등교육까지 받은 여성이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사회적 기대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배웠다는 이유로, 신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사 일이나, 자녀를 돌보거나, 집안을 돌보고 섬기는 일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교육받은 이유가 좀더 쟁쟁한 집안에 시집가기 위해서인가 하고 물었던 일이 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에 일제시대 대학생들은 특별했다. 방학 동안도 자기 한 몸 좋자고 빈둥거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고향을 찾았다. 농촌을 찾아다녔다. 나라 잃은 설움을 배워서 극복하자고 했다. 특히 전도에 열심을 내었다. 대부분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에서 공부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방학을 맞은 학생들의 구령의 열정, 영혼 전도의 열기는 각별했다.
2. 김활란과 7인 전도대
이화학당 김활란 선생과 학생들 6인으로 구성된 7인 전도대가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1920년 6월 이화학당 선생으로 있던 김활란은 7인 전도대를 조직했다. “일제의 발굽 아래 그대로 무지 속에 살고있는 우리 민족을 좀더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한 김활란이 전도대 조직을 제안했다.
김활란의 이러한 제안에 선뜻 여섯 명의 학생들이 호응하고 나섰다. “이 나라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으며 이화에서 자라난 선생과 학생으로 편성” 된 이 전도대에 선생 김활란, 대학 2~4학년 중에서 홍에스터, 김함나, 윤성덕, 김폴린과 보육과에서 김애은, 김신도 등이 한데 뭉쳤다. 찬송과 설교, 신앙 증언을 능숙하게 하도록 훈련받은 뒤 전국을 돌며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YMCA에서 첫 강연회를 가진 뒤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갔다. 애초에 “평양, 신의주, 안주, 곽산, 정주, 북진, 양시, 차령관, 강서 등을 거쳐 남으로 제주도까지 꿰뚫을 계획”으로 나섰다.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였다. “이십을 전후한 한창 젊은 여성들이 광당포로 지은 검소하고도 단정한 옷을 입고 흰 판에 붉은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날리며 전도대가”를 부르며 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류금주 목사
<전 서울장신 교수·현 청교도신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