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형번호 675번!” 번호를 크게 불러대는 반민특위(反民特委) 특별부 검사의 목소리가 재판정을 쩌렁쩌렁 오늘도 울리고 있었다. “네!” “이름을 대시오” “이광수입니다” 이어 차례로 최남선, 노천명, 최린 등이 모기 소리만큼 관등 성명을 대고 있었다. 온갖 수모를 당하며 재판을 받았던 지난날 부끄러운 그때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떠오르며 오늘도 춘원을 괴롭히고 있었다.
춘원은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3월에 병보석 되었고 8월에 불기소 처분되었다. 천원의 명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실추되었고 마음의 상처는 도무지 아물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반민특위 특별부 검사는 춘원에 대해 이렇게 논고했다. “(중략)… 피고는 민족의 지성이고 희망이었다는 사실, 피고는 그 누구보다 공공의 혜택을 받은 자이며 많은 이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혜택을 받은 자의 의무와 책임감, 다른 것을 다 떠나 피고의 그 가벼움, 반민족의 변절…. 본인은 그 가벼움으로 피고에게 유죄를 선언하노라”라고 선고했다.
58년의 삶을 살다가 간 그의 인생을 통해 남겨진 문학, 철학, 사상, 언론학적 유산은 정말 넓고도 깊다. 1923년 5월부터 1933년 까지 9년 동안, 춘원은 하루 평균 원고지 70장의 글을 쏟아냈다. 13편의 소설과 시를 비롯해 사설, 평론, 시조, 동화, 수필, 서평, 기행문, 번역물에 이르기까지, 글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장르의 작품을 거침없이 창조해 냈었다.
춘원은 한 시대를 대표한 최고의 지식인인 동시에 근대 초 당시의 고난을 온몸으로 체험한 근현대 수난사의 분신에 해당되는 대표적 위인이었다. 춘원의 파란만장한 삶은 1919년과 30년 뒤인 1949년의 두 가지 모습을 통해 극명하게 나뉘어 볼 수 있다.
춘원은 1919년 2월 8일 400여 도쿄(東京) 유학생의 대표로 독립선언서(2. 8선언서)를 쓰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철저히 한 애국지사다. 그리고 1949년 2월 7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特委)에 의해 체포되어, 675번 수형번호를 가슴에 단 친일 변절자 죄수로서의 춘원은 분명 다른 신분이었다.
이와 같은 극과 극의 시간을 피부로 느끼며 함께 살아 온 춘원을 잘 이해하며 살아온 것은, 그래도 그의 피붙이인 삼남매와 아내 허영숙(許英淑) 뿐이었다. 오로지 이들만이 근현대사를 체험하고 기억해 주는 춘원의 역사의 증인들인 셈이다.
이곳 넙죽 바위에 누워서 흐르는 솜털 구름을 보면서 춘원은 잠시 지난날을 회상하며 자신을 다시 반추하고 있었다. “누워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가. 운허가 눈이 빠져라고 기다릴 텐데…” 운허가 세운 ‘광동중학교’에서 애들에게 작문 기법과 영어를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봉선사 절에서 밥이나 얻어먹고 있는 주제에, 이렇게 늦장을 부리고 있으니…
자리에서 일어난 춘원은 갑자기 마음과 발걸음이 바빠졌다. 춘원은 헉헉거리며 봉선사 절 안으로 들어섰다. 중앙 가운데 무척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큰 느티나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뒤쪽으로 운허 스님에 으해 건립된 현 전각으로 큰 법당이 있는데 좀 독특하다.
큰 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 그 현판이 순 한글로 쓰여져 있어 좀 특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운허 스님의 뜻에 따라 쓰여진 한글 현판이란다. 큰 법당 마당 석불탑 옆에서 운허 스님이 춘원을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춘원을 본 운허는 손짓으로 좀 빨리 오라는 몸짓을 하며 춘원을 그의 숙소인 ‘다경향’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면서 운허는 못마땅한 듯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춘원! 반민특위에서 무슨 전갈 받은 거 있나?” “무슨 전갈?” 춘원은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기다리던 운허가 오늘 광동중학교의 수업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 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른, 밥맛없는 반민특위 일을 물어보니 춘원은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