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9)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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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로 나날을 보내던 시절 ①

장사로 번 돈 가난한 친구 도와

할아버지와 친구의 죽음

‘밥에 빚 지고 간다’ 친구 유언에

해마다 하루 금식하며 기도

그 무렵 광은 소년은 또 엉뚱한 짓을 하여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소한철이어서 추운 나날이 계속되던 무렵이었다. “광은이가 밤엿 장사를 한다.”  이런 소문이 마을에 쫙 퍼졌다. 깜짝 놀란 것은 광은 소년의 어머니와 형님이었다. (아무리 가난하기로서니 엿장수로 내보낸 일은 없는데…)

하긴 광은 소년이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집에 일찍 들어와본 일이 없다. 늘 밤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오곤 했다. 친구들과 노느라고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광은 소년이 밤거리에서 엿장사를 하고 있단다.

어머니와 형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밤거리에 나가 보았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사람들 왕래가 제일 번잡한 길거리에서 광은 소년은 밤엿을 팔고 있었다. “계피 건강, 고추 양념의 밤엿이요오!” 열두 살짜리 소년이 머리에 엿상자를 둘러메고 밤거리를 누비며 구성진 목소리로 밤엿을 팔고 있었다.

그 캐치플레이즈도 아주 독창적이었다. 그저 밤엿이 아니라 한약재인 계피를 넣어 건강을 강조하고, 고추 양념이란 말을 넣어 고소한 맛을 강조하고, 그저 달다고 하지 않고 ‘밤엿’이란 말을 넣어 듣는 사람의 구미를 돋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형은 대견해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질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은아, 이게 무슨 짓이냐!”

어머니는 억지로 아들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왜 엿장사는 하게 되었느냐고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세상 물정도 알고 사람 인심도 좀 알기 위해서요.” “그동안 그 고생해서 돈은 좀 벌었니?” “그럼요.” “그 돈은 어떻게 했니?” “친구 줬지요. 월사금 못 내는 친구가 있거든요.”

어느 소년의 죽음

그 무렵에 광은 소년은 크나큰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할아버지께서 반신불수로 거동을 못하시고 계시다가 돌아가신 데다가, 아주 친한 친구가 죽은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광은 소년이 세 살 적에 홍역을 앓게 되자, 밤새워 등에 업고 기도해 주신 분이다. 그 할아버지께서 1년간 반신불수로 앓으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원래 광은 소년의 아버지 황도성 씨는 병약한 몸이라 사업을 할 수 없었고, 생계를 이끌어 나간 사람은 광은 소년보다 10년 연상인 형 태은 씨였다. 그가 피현이란 이웃 거리에 가서 분탕과 미역을 사 가지고 돌아올 때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기다리곤 하시던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형 태은은 아무리 늦어도 아홉 시까지는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의 걱정을 덜어 드려야 했다.

그렇듯 자상하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칠십이 넘은 나이시니 천수는 다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슬픔은 한없이 컸고, 새삼 인생 무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 무렵 광은 소년은 용암포 중앙교회 소년 면려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서기로 김창륜이란 소년이 있었다. 그는 광은 소년보다 한 살 아래였다.

창륜은 아주 잘생긴 소년이었다. 그러나 얼굴 한 군데에 혹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 사실을 비관하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의 창륜은 자기 신체상의 결함으로 해서 밖에 잘 나가지 않고, 집에 앉아 독서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신구약 성경을 두 번이나 읽었다.

그런 창륜을 광은 소년은 극진히 위했다. 좀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아주 현명하고 재치있는 소년, 그러나 그보다는 인생을 깊이 생각하는 소년이라서 광은은 그를 좋아했고, 창륜 역시 세상을 보는 눈이 자기와 비슷한 광은을 아주 좋아했다.

창륜의 부모는 혹 때문에 언제나 인생을 슬프게 보는 자식이 안쓰러워서 의사와 의논한 결과 수술을 해 보기로 결정을 했다. 의사의 말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많지는 못하지만, 아주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단, 이런 시골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하고, 비용은 많이 들지만 서울에 가서 한번 해 볼 만하다고 하였다.

창륜은 수술 경과가 좋지 않아 불행이 닥치더라도 수술은 꼭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비용을 마련하고 모든 준비를 다해 서울 병원으로 길을 떠난 것이 벚꽃 피는 4월 어느 날이었다.

며칠 뒤 창륜은 수술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수술 경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새하얗던 안색이 수술을 받고 돌아온 것을 보니 백지장처럼 핏기가 없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의식도 가물가물했다.

 하루가 지났다. 머리맡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어머니에게 창륜은 “광은이를 불러줘”하고 부탁했다.

방안에는 광은과 창륜만 남았다.

“나는 이제 죽는가 봐.” “그런 소리하지 마.” “아니야, 내 마지막 말을 들어.” 창륜은 광은 소년의 귀를 가까이 대게 하더니 무슨 말인가 한 마디 하였다. 그 말을 듣는 광은 소년의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잠시 뒤 어머니가 방안에 들어와 보았을 때 창륜은 잠자듯이 평화로운 자세로 숨져 있었다. 창륜이가 숨지면서 광은 소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광은 소년은 그 말을 아무에게나 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해부터 벚꽃 피는 4월이 오면, 광은 소년은 하루를 금식하는 날이 생겼다. 처음에는 식구들도, 심지어 어머니까지도 그가 왜 금식을 하는지 까닭을 몰랐다.

광은의 금식의 이유가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근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였다. 우연한 기회에 광은은 창륜의 형인 김창인 목사에게 “그때 창륜이는 ‘나는 밥에 빚을 지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생각하니 영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광은이 금식한 것은 친구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김창인 목사(서울 충현교회 원로목사)는 설교에서 가끔 이 에피소드를 인용하곤 한다. 그는 이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모르긴 하겠습니다만 아마 황광은 목사는 죽는 해까지 친구 창륜이가 죽은 날에 하던 금식을 중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황 목사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고학을 하던 시절

광은 소년은 용암포에 있는 용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에 양시에서 용암포로 온 가족이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날로 기우는 가세를 조금이라도 바로잡아 보기 위해서, 형 태은 씨는 좀더 큰 도시인 용암포로 이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태은 씨는 용천 인쇄소에 외무원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용암포 중앙교회 집사로 일하면서 유년부장직을 맡았다. 뒷날의 이야기지만 태은 씨는 중앙교회서 1940년에 장로로 피택됐으나 너무 연소하다는 것을 이유로 사퇴하고, 서울에 와서 1957년에 성광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게 된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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