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도쿠도미’의 살생부와 협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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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계속 말하지 않고.” 독촉하는 운허를 지긋이 올려다보며 춘원은 속삭이듯 말을 이어 갔다. “해방이 도둑같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나 정말 몰랐어! 바보같이 내가 내 영특함에 빠진 것이 아니고 세상이 확 미쳐 버렸던 거야!”

춘원은 해방 이야기를 또 입에 올렸다. 춘원의 목소리에는 거의 울음에 가까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몰아친 것처럼 보였다. “운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가 뭔지 알어?” 갑자기 절에서 찬송가 얘기는 뭐지? 춘원은 원래 독실한 불교 신자가 아니던가? 운허는 춘원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춘원의 물음에 운허는 대답않고 춘원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사릉집에서 나는 막내딸 정화와 같이 풍금을 치며 이 찬송가를 자주 부르곤 했었지.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이 찬송은 시련에 아파하는 내게 언제나 따스한 위로를 주는 찬송가지. 내가 풍금을 치고 우리 정화가 독창을 하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나의 50여 년의 삶은 온전히 십자가의 짐같은 것이었다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무거운 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힘겹게 오르게 있는지 몰라.”

춘원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안경을 벗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마구 닦아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춘원은 어느새 운허의 가슴에 그의 머리를 슬며시 갖다 대고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흐느끼고 있었다. 

운허는 돌리던 염주를 자리에 내려놓고 들썩거리는 춘원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운허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쯧쯧…. 우리 형 춘원은 아직도 어린애 같구먼! 언제나 철 들건가 쯧쯧…”

허영숙과의 운명적인 만남

도쿄(東京) 신주쿠 초여름의 어느 주말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아주 쾌청한 아침이었다. 허영숙은 스포티한 가벼운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제법 짧은 검정색 주름 스커트에 드러난 하얀 다리가 쭉 뻗어서 조금은 예뻐 보인다. 어깨위를 가볍게 덮고있는 녹색 스카프가 푸른 상의 재킷과 조화를 이뤄, 오늘 허영숙을 더욱 화사하게 보이고 있었다.

지금 허영숙은 신주쿠 도로변 중심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부카케’ 병원을 출근을 하는 길이다. 이 병원은 허영숙이 다니는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 클래스메이트 ‘씨즈코’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이다. 친구 씨즈코는 주말이면 오후 3시까지 허영숙과 함께 아버지 병원에서 의사 실습생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경성 직물상집 부잣집 딸인 허영숙은 신여성으로 일본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와서 제일 먼저 가깝게 사귄 친구가 씨즈코였다.

마음씨 고운 씨즈코는 친구 허영숙을 좋아해서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굿모닝!” 병원 안에 들어서면서 허영숙은 그녀의 성격대로 괄괄한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기운차게 하고 있었다. 저쪽 구석에는 벌써 씨즈코가 와서 일을 하며 손을 번쩍 들어 보인다. 그러면서 잽싸게 씨즈코가 허영숙에게 다가오더니 새색시처럼 그녀의 뺨에 얌전하게 키스를 해 준다. 

이때다 싶게 기다렸다는 듯 허영숙이 씨즈코의 목을 힘껏 끌어 당기며 반듯한 그녀의 이마에 진한 입술 자국을 남긴다. 그리고는 아이들처럼 서로 손을 맞잡고 빙빙 돌면서 병원 사무실 떠나가라는 듯 웃음보를  터트린다. “하하하… 흐흐흐…” 병원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채, 이들의 순진 발랄한 처녀의 모습을 보고 모두 즐거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허영숙이 내과 병동 회진(回診)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 오는데, 회계과 앞에서 어떤 대학생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어디서 얼굴이 익은 듯하여 다시 돌아서서 자세히 쳐다봤다. 깔끔하게 소매에 흰줄을 친 교복을 보니 분명 명문 와세다 대학생 복장이다. 주인공은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자였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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