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도쿠도미’의 살생부와 협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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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슴팍에 하얀 바탕의 명찰에 까만 한문 글씨로 ‘李光洙’라고 쓰여져 있지 않는가. 허영숙은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이 나왔다. 이 학생이 바로 이광수구나. 지금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는 청년 소설가.

경성에서나 도쿄의 신여성 유학생들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그 미남 작가 대학생을 오늘 이곳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성격이 여성이지만, 남자 이상으로 직선적이며 솔직하고 적극적인 허영숙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아~ 실례합니다. 저어- 매일신문에 연재하는 ‘무정’의 작가 이광수 선생 아니십니까?” “네, 그렇소. 제가 이광수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젊은 청년은 좀 당황하는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저는 이 병원의 내과 레지던트(Resident) 허영숙이라 합니다. 조선 경성에서 왔습니다. 만나뵈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병원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허영숙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네, 내과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려던 참입니다만….”

남학생은 좀 계면쩍은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허영숙은 이 청년 학생, 무슨 말못할 애로사항이 있구나 하는 직감이 이내 뇌리에 전달이 왔다. “회계과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지만, 제가 좀 도울 수는 없는지요?” “아~ 아~” 젊은 청년은 몹시 난처한 모습으로 계속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머리 빠른 허영숙은 “아- 알겠어요. 집에서 지갑을 빼놓고 왔군요.” 얼른 이렇게 둘러댔다. 그제서야 학생은 뒤통수에서 손을 내리며 “네~ 그렇습니다.” 그만 지갑을 놓고 와서. 허영숙은 이광수가 굳세게 붙들고 있는 진료증을 손에서 빼앗아, 얼른 회계 창구에 디밀고 계산을 요청했다. 이광수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광수는 허영숙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오늘 제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올 때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이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이런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만남은 아주 작은 호기심으로 이들 남녀에게 심어주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정오가 훨씬 지난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본부 사무실에 잽싸게 돌아오니 그때까지 식당에 가지 않고 씨즈코는 혼자서 친구 허영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내 식당 배식은 이미 끝난 시간이라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병원 뒷골목 식당가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멍하니 말문을 닫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친구를 보면서 씨즈코는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그때서야 허영숙은 잠결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씨즈코를 쳐다보며 “응 나 오늘 이광수를 만났어. 우리 병원에서….” “글쓰는 조선인 청년 작가 이광수?” “그래, 지금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고 있는 이광수.” “어디서?” “우리 병원 회계과 앞에서.” “어디가 아파서?” “나도 몰라.” 씨즈코도 이광수라는 말에 후다닥 놀라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는 허영숙은 입에 음식을 떠 넣으면서도 생각은 온통 오늘의 이광수에 가 있었다. 사슴 눈을 가진 춘원의 커다란 눈망울이 왜 그리도 슬퍼 보였을까? 치료비를 제대로 내지 못해 엉거주춤 서서, 묻는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던 그 민망스런 모습이 지금 허영숙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무정(無情)의 인기 소설가로, 지금 경성과 도쿄에서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이광수가 돈이 없어 병원 치료를 제대로 못받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 줄까? 어디가 얼마나 아파서?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식사를 건성으로 하고 있는 허영숙의 어깨를 다시 한번 툭 치면서 씨즈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첫 눈에 갔구나.” “……” “완전 빠지구, 가면서 진료과에 들러서 그 남자의 치료 차트를 살펴봐야겠군! 실은 나도 궁금하니까.”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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