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톡] 하얼빈, 그 위대한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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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의 ‘하얼빈’을 밤새 읽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그린 소설이다. 31살의 젊은 안중근이 그 엄청난 일을 홀로 주도하면서 느꼈을 고뇌와 용기에 전율했다. 한 인간의 삶에서 이토록 위대한 결단이 있을 수 있을까? 독일 나치의 히틀러 암살을 실행하려다가 체포되어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형수로 떠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삶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놀라운 역사다. 

우리에게 이런 위대한 안중근이 있었음이 은총이다. 문제는 그런 안중근을 바라보던 파리외방전교회 뮈텔 주교와 당시 가톨릭의 태도다.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안중근의 거사를 폄훼하고 교회가 거부했던 역사는 부끄러운 교회의 기록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물론 후일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 가톨릭은 안중근의 행동이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신앙적이며 민족적 경험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수용했음은 조금의 위안을 준다.

본회퍼와 안중근이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은 악을 윤리라는 협소하고 천박한 자기 변증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이들의 억지다. 악은 악이며 그 악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성스러운 순종의 삶만이 실현할 수 있는 거룩한 신앙적 행위다. 누가 전태일의 죽음을 단순한 자살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런 논리라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타살을 가장한 자살이라는 불경스러운 주장에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안중근이 죽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악이며 그것은 제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미쳐 날뛰던 역사를 거스르려는 연어의 저항이다.

저항할 수 있는 자만이 살아있는 존재다. 거짓되고 악한 역사와 현실에 저항할 수 있음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그것이 예수의 삶이었고, 남미의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였으며, 독일의 본회퍼였고, 우리의 안중근이었다.

교회는 인간과 역사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악에 저항하고 그 악을 제거하려는 헌신의 삶을 결단하지 못하는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오히려 안중근을 살인자와 죄인으로 정죄하고, 교회 밖으로 떠난 사람이라며 그와 결별하려는 교회의 비겁함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당시의 뮈텔 주교와 가톨릭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 그런 위선과 비겁한 자기혐오의 그림자가 서성거리고 있다.

거짓되고 망령된 역사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교회의 참 모습이 아니다. 지금은 안중근의 용기가 더욱 필요한 시대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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