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1762년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미(斗尾)’·‘두릉(斗陵)’에서 태어났다. 1776년 15세로 관례에 이어 혼례를 치루고 관료생활을 시작한 부친 정재원을 따라 여러 지방을 순회하다 1789년(정조 13) 알성시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여러 정책을 상주하고 간언을 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는 젊고 재기발랄한 다산을 측근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정조를 만난 지 9년째로 접어든 1791년 서학(西學)에 대한 옥사가 일어났다. 목만중, 이기경 등이 서학의 강독에 참석하고 서학을 받드는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잡으려 한 것이다. 다산 선생이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은 후 맞는 시련이었다. 하지만 1794년에 청나라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북경 구베아(A. de Gouvea) 주교의 명을 받고 조선 한양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을 당한다. 이때 다산 선생은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한직으로 보내졌고 1800년(정조24)대에 들어서 정쟁의 어둠이 드리우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철마산 자락 마현(馬峴)으로 내려와 여유(與猶)를 당호(堂號)로 걸고 학문에 정진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 또 발생한다.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로서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801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일어난다. 하지만 황사영백서 이후 강진으로 유배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과 남양주 마재의 본가로 돌아와서 방대한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인식되어온 한국사에서 근 현대사의 흐름은 3·1운동과 4·19를 거치며 변화와 개혁을 이뤄온 밑바탕에는 ‘다산정신(茶山精神)’이 국민의 정서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서거하고 열강의 침탈로 국권을 상실할 일제강점기에 접어들 때 그의 학문은 시대와 민족을 깨우는 근대 정신문화의 시발점이었다. 1907년 교과서『유년필독(幼年必讀)』에 보면 ‘우리나라 500년 제일의 경제가이자 서양 문명에 뒤지지 않는 학자’로 소개하고 있다. 다산 선생은『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포(經世流布)』등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개인 저작으로 동양 최대이며 분량에서 뿐만 아니라 수준에 있어서도 최고이다. 오늘날 그의 학문은 다산학(茶山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
다산 선생은 유네스코(UNESCO)가 인정한 세계적 학자이자 인물이다. 다산 선생은 ‘주류 사회의 낡은 이념을 대체하고 미래 대안을 찾아가는 위대한 선각자’,‘온 나라가 썩지 않은 곳이 없다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개혁가’,‘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미래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근 현대사에서 다산 선생 평생의 고민이자 꿈이었던 민생(民生)을 위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종합을 통해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 ‘신아구방(新我舊邦)’이 그것이다. 다산 선생이 품었던 꿈은 지금까지도 완성되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다. 현실의 모순과 시대의 아픔이 있더라도 대안을 제시했던 다산 선생처럼 아무리 메타버스 시대라고 하지만 새로운 대한민국에는 한국적 다산 정신문화를 진흥해야 할 시점이다. 최근 남양주시의 주광덕 시장이 남양주시를 다산정신의 실천의 메카(Mecca)로 만들고, ‘세계 속의 다산’으로 브랜딩(Branding)하는 작업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지금은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민생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그렸던 다산의 거대한 꿈을 우리 마음에 담아내고 다산정신으로 완성시켜야 할 시점이다.
이효상 목사 (다산문화진흥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