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가을에 보내는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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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린 시절엔 편지를 많이 썼고 간단한 사연은 우편 엽서로 소식과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학교에선 6.25 기념일이나 성탄(크리스마스) 때엔 국군 장병에게 위문편지도 썼다. 뿐만 아니라 서툰 솜씨로 해외 친구들에게 pen-pal 편지 교환도 종종 했다. 대개 가을이 되면 ‘황금 물결치는 중추가절에 부모님 일향만강하옵시며···’ 하는 격식을 갖추었고 끝에는 불초소생(不肖小生) 여불비(餘不備)란 형식적 구절도 썼다. 요즘엔 손글씨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거의 없다. 카톡이나 핸드폰으로 용건이나 소식을 주고받고, 좀 긴 사연이면 이메일로 주고받는다. 이런 사정에 이해인 수녀께서 가을 편지를 썼다. ‘편지’라는 말이 생소해진 요즘 세상에 그것도 가을에 보내는 편지라니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여러분과 함께 공동 수신인이 되어 편지 한 통을 받아 보기로 하자.

①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흰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②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집 앞마당, 대추나무 꼭대기에서 몇 마리 참새가 올리는 명랑한 아침 기도, 바람이 불어와도 흩어지지 않는 새들의 고운 음색, 나도 그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③ “한 포기의 난(蘭)을 정성껏 키우듯이, 언제나 정성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기도이지요? 물만 마시고도 꽃대와 잎새를 싱싱하게 피워올리는 한 포기의 난과도 같이, 나 또한 매일매일 당신이 사랑의 분무기로 뿜어주시는 물을,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신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요.” ④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잎들. 작년에 끼워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잎을 보면 잃었던 시어(詩語)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정답게 내 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⑤ “급히 할 일도 접어두고, 어디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가을. 정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당신의 모습, 이웃의 모습. 떠나서야 모두가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은 그런 마음. 그러나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오늘을 더 알뜰히 사랑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⑥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이의 눈 속에 출렁이는 그림 한 점. 샤갈의 <푸른 장미>.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선율. <G 선상의 아리아>. 내게 이런 모든 것을 느끼도록 해주신 당신의 크신 얼굴이 더 크게 살아오는 가을. 루오의 그림 마다에서 당신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부릅니다.” ⑦ “오늘은 길을 떠나는 친구와 한잔의 레몬차를 나누었습니다. 이별의 서운함은 침묵의 향기로 차(茶) 안에 녹아내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서로의 평화를 빌어주고 있었습니다. 정든 벗을 떠나보낼 때는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헤어질 때면 더욱 커 보이는 그의 얼굴. 손 흔들 때면 더욱 작아 보이는 나의 얼굴.” ⑧ “새벽에 성당 가는 길엔 푸른색 나팔꽃 한 송이와 꼭 마주치게 됩니다. 그 꽃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그 꽃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유순하고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⑨ “귀뚜라미 노랫소리에 깊어가는 가을밤. 내 피곤한 육신을 맨땅에 누이듯이, 작은 나무 침대 위에 눕히면 오랜만에 달고 싱싱한 사탕수수 같은 나의 꿈과 잠. 꿈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긴 여행을 합니다. 꿈꾸는 것조차도 당신 안에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⑩ “보름달 속에 비치는 당신의 빛나는 모습. 달처럼 차고 또 기우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달빛에게 세례받은 하얀 박꽃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잰걸음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이든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잊지 못하는 친구든 그 누군가에게 손편지를 써봅니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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