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목단상] 化壇 유재헌 목사의 파령유옥(把靈劉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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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유흥렬은 1863년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삼리에서 출생해 삼십세의 나이에 언더우드의 전도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 상투를 자르고 구습을 타파하면서 개화운동과 복음전도에 앞장서게 된다. 문중으로부터 버림받고 멸시와 천대를 당했으나 그의 가슴에 붙은 복음의 불은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언더우드와 동역자가 되어 제중교회(현 남대문 장로교회)의 조사(助師)로서 사역하면서 용인, 광주, 평택 등지에서 세워진 소속 교회들의 순회 조사로 시무했다. 

그는 당시 제중병원(현 세브란스병원)의 간호사인 김인대와 결혼한다. 1905년 요인 김양교회의 조사로 시무하다가 1919년 장로가 되어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은지 이틀후인 聖役 50년을 마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유재헌 목사는 그의 부친이 제중교회에서 조사로 시무하고 있던 1904년 3월 21일에 태어나서 독자로 성장했다. 경신학교를 거쳐 피어서성경학교를 다니던 중 1926년 6.10만세 시위에 가담했고 그후 피어서성경학교의 지하에서 배재고보의 김동지 문창모 손영엽 염필주 차진호 김조영 차규섭 협성학교의 초영식 손병석 YMCA의 김동석 등과 재차 만세운동을 위해 모의한다. 6월 16일에는 거리에 뿌릴 독립문서를 등사하던 중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6월 30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 나왔다. 

그후 그는 경기도 용인의 동아일보 지국에서 기자로서 일하면서 갑성회라는 민족계몽운동 단체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일경의 감시와 핍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새로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게 아니라 차라리 적의 진지 한가운데 들어가 활동하는게 좋겠다.” 그해 그는 우국동지 셋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에 이른다. 주로 구두수선을 하면서 고베(神戶-신호)의 관서성서신학교를 마치고 1931년 12월 25일 도쿄의 미가와지마(三河島)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그후 도쿄, 고베, 요코하마, 아까시 등지에 ‘조선기독교독립교회’를 세웠고 노방전도에 힘을 쓰던 중 수차 투옥 감금되어 고난을 당했다. 유재헌 목사는 손수레를 개조해 판자로 방을 만들어 그 안에 기거하면서  그 ‘이동가옥’을 끌고 오늘은 이 거리 내일은 저 거리로  옮겨다니며 구두수선을 하면서 전도했다. 그는 자기의 손수레 가옥에 큰 글씨로 ‘파령유옥(把靈劉屋)’이라 쓴 간판을 내걸었는데 그 의미는 ‘영혼을  붙잡는 유씨의 집’이다. 일본에 건너간지 14년 동안 이렇게 독립교회들을 개척하고 구두수선과 노방전도를 하며 지내던 중 1941년 일본 경찰에 옥고를 치르게 된다. 1년여 간의 옥고를 치른 후 그는 1942년 고국을 떠난지 14년 만에 강제송환되어 그의 부친이 목회하고 있는 용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가택 연금상태에 놓여 일체의 행동을 금지당한채 해방되기까지 마치 미디안 광야의 모세처럼 한숨과 고통 속에 나날을 지냈다. 

김종희 목사

• 경신 중ㆍ고 전 교목실장 

• 전 서울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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