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육원 원생들의 기록 ①
욕 먹을 수 있는만큼 컸다는 것 기뻐
‘황 형님 가르침 실천키로 마음먹어’
‘환갑 지나도 1일 1선 실천 노력해’
짧은 생애에도 많은 씨 뿌리고 가
8월 11일
소년 MP를 나는 지도했지만 한번도 그들의 입을 통해 선생들의 일을 묻지도 듣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MP를 스파이로 썼다고?
8월 13일
문제 중의 큰 문제는 죽는 문제다. 어떻게 죽어야 하며, 어디서 죽어야 하며, 누구와 죽어야 하느냐? 그러나 죽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영원히 죽지 않는 문제일는지 모른다. 죽음의 직전에서 느끼는 것은 오한과 기갈이다. 육체 이외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갈등이 있다.
8월 15일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나를 욕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기뻐했다(생각해 보고). 내가 욕을 먹을 수 있는 만큼 컸다는 것이다. 나를 원망할 만큼 나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8월 17일
어머니 병환에서 얻은 것. 인간은 문 앞에 물결이 일어야 자리를 옮긴다는 것을 알았다. 보다도 더 어리석은 것은 무덤에 드신 후에야 진지상을 차리는 일이다. 어머니 병환이 중해질수록 초조하고 떨렸으나, 마지막 다다른 곳은 기도라는 곳이다. 인생의 마지막은 신에게 굴복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은 요컨대 하나님의 밥이다. 누구나 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았다. 내 어머니의 병을 자기 어머니의 병처럼 애타하는 이도 있었다. 그 무렵에 광은은 또 이런 구절도 적어 놓아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나는 내 앞에 곤란이 올까 보아 근심함보다 차라리 평단한 길만이 계속될까 보아 근심한다.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아내를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도 다 마찬가지다. 괴로운 살림을 외로이 치러나가는 아내를 생각하는 무능한 남편의 울음은 곧 한국의 울음일 것 같다.
이런 착잡한 심정에 처해 있을 때 광은 앞에 나타난 것이 김유선 양이었다.
이윤태의 회고
다음은 한국보육원 출신으로서 현재는 미국 오클라호마 시에서 살고 있는 이윤태 씨의 회고이다.
나는 황 형님의 1951년 8월 1일자 일기에 “윤태에게 알려 주고야 말았다. 네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된 장본인입니다. 그 일기는 그 당시 내가 처해 있던 상황을 설명하면 더 잘 이해가 될 것으로 믿고 몇 자 적습니다.
나는 경춘 가도에 위치한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답내리(안골)에서 외독자로 부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열여섯 살 때 6‧25를 맞았습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 선생님으로 계시던 은사 김수철 목사님께서 6‧25중에 통역 장교로 입대해서, 미군 제2사단에 근무하시다가 1‧4후퇴 바로 직전에 잠시 우리 고향에 오셨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과 나를 먼저 제주도까지 피난시키고, 부모님은 따로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이 제주도까지 같이 온 후에 나는 나이가 어리니까 임시로 한국보육원에서 살도록 조치를 취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그곳 교육부장은 김 목사님과 총회신학교 동기인 박윤삼 목사님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보육원 생활이 고아 아닌 고아로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8월 1일에 김수철 목사님이 다시 제주도로 찾아오셨고, 그는 당시 교육부장이신 황 형님을 모시고 농업고등학교와 제주 제1중학교 사이 운동장 옆에 있는 무성한 벚나무 밑으로 가셨습니다. 두 분 선생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그 슬픈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황 형님의 일기는 그 순간의 자기 심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집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시골 순박이었기 때문에 고아원 같은 복지 시설이 있어서 전쟁고아들을 수용하고 교육시키고 키워주는 곳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고, 미제 치약과 칫솔로 이를 닦고 우유죽을 먹어본 것도 처음이라 모두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더더구나 황 형님의 소년단(반장), 아동시(제2대시장), 신문사(편집 담당), P.M.C. 클럽 회원(7명 강규희, 김차운, 김정훈, 강대수, 이광현, 이희병, 이윤태)으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소년단의 1일 1선, 정직, 순결, 무사, 사랑 등 목표와 우리들 7명의 형제가 북두칠성의 별 하나씩을 자기 별로 정하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언제 어디서나 저 별을 보면 우리가 서로 교통하고 만날 수 있다는 문학적이고 희망적인 정서 교육을 심어주신 것이 황 형님이셨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부터 황 형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어린 영아반 아이들이 많이 있는 쪽 화장실 청소를 자진해서 하기 시작했고, 그 일을 오래 계속했더니 결국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어 황온순 원장 어머니의 표창장을 받게 되었는데, 그 표창장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나 내 나이도 환갑을 지나게 되었으나, 지금도 길가에 떨어진 휴지조각을 보면 주워서, 1일 1선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나의 자녀들(3남매)에게도 황 형님의 가르침을 씨뿌려 주어 모두가 전문 분야에서 봉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1954년에 이희병과 함께 한국보육원에서 나와 서울에 와서 고학하고 있을 때 가끔 난지도에 계신 황 형님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면 사모님과 형님께서 쌀과 마른 생선 같은 것을 싸주시곤 해서 내 어려운 고학 생활의 짐을 덜어 주셨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징집 연령이 되어 학업을 중단해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되었고, 학업을 중단하면 다시는 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형님께 상의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내 나이를 줄여 가호적을 해주셔서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삼동 소년시의 주소인 서울 상암동 8번지가 나와 이희병의 본적지가 되었고, 황 형님의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읍 용암동이 나의 원적지가 되었습니다.
황 형님의 장례식날 나도 대광고등학교의 장례식장에 갔었습니다. 황 형님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천여 명도 넘는 많은 조객들이 모여 애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사셨으나 너무나 많은 것을 이루시고 또 많은 씨를 뿌리고 가신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황 형님께서 뿌려주신 사랑의 씨가 우리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번져가고 있음을 볼 때 황 형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주도에서 지도와 사랑을 받으며 살았던 형제들의 근황을 아는 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11명의 명단이 적혀 있으나, 당사자들의 의사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략함-엮은이)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