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남단에 가면 건조한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생활하는 ‘스프링복(springbok)’이라는 영양이 있다고 한다. 이 스프링 복이 집단 떼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백, 수천 마리로 무리를 형성하는데 시속 94km나 되는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 치타조차 쉽게 잡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스프링복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난 이유를 학자들이 밝혀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식욕을 가진 스프링복은 무리를 지으며 풀을 먹곤 하는데, 뒤에서 풀을 먹던 녀석이 앞선 녀석보다 많은 풀을 먹기 위해 더 빨리 앞으로 달려 나갔고, 앞에 있는 녀석은 더 빨리 앞으로 달려나가게 되고, 그렇게 조금이라도 앞서려고 서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뛰기 시작한 목적은 풀을 뜯으려고 한 것인데 달리다 보니 풀을 뜯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냥 계속 빨리 달리기만 하다가 목적을 상실한 채 사력을 다해 달렸던 것이다. 그런데 한번 뛰기 시작하면 풀 뜯을 시간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뛰기만 한다. 그러다 갑자기 설 수가 없어 모두 위험하게 되어 함께 죽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이런 스프링복의 모습이 아닌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늘 에베소서 5:18의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을 되새긴다. 종교개혁자 쟝 깔뱅은 ‘시간을 사탄으로부터 다시 되찾아 사오는 것’으로 해석했다. 사탄이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시간을 하나님의 도구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제한된 시간을 이용해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고, 분주하게 하고, 조바심을 느끼게 하고 당황하게 한다. 시간을 구속하는 방법은 시간을 영원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영원을 바라보며 영원으로 되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살 때 우리는 시간이 더 소중해지는 것이다. 영원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시간을 다시 살 수 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사후의 삶(after life)”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실상은 이 땅에서의 삶을 “사전의 삶(before life)”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 땅에서의 현재의 시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영원을 향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삶의 서론일 뿐이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는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역사가 끝나고 ‘영원’이라는 차원의 역사가 다시 임하는 것이다. 영원은 시간이 길어진 것이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시간과 영원’을 이렇게 구별했다. “시간은 항상 머물러 있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로 지나가는 것이다.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현재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항상 현재에 계신 분이시다. 우리의 모든 과거의 시간 전에도 현재로 계시고, 모든 미래의 시간 후에도 현재로 계시는 분이다. 우리의 세월은 모든 순간이 다 지나가버리지만 하나님의 세월은 항상 동일하시며 항상 ‘오늘’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며 모든 만물을 흘러가는 시간 속에 두셨다. 인간은 그 시간 속에서 타락했고 시간속에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만물의 시간을 끝내시고 영원으로 다시 변화시키실 것이다. 때가 악하므로 더욱 세월을 아껴야 한다. 영원을 바라볼수록 시간은 더욱 소중해진다.
이재훈 목사
<온누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