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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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 2> 

한국보육원과 김유선 여사 ④

한국보육원 원생들과 함께…보람있어

황광은 선생 아동설교에 홀딱 반해 버려

그의 모습과 성품에 마음 자꾸 끌리지만

황 선생에 대해 다른 마음 품어선 안돼

우리는 각각 맡아야 할 부서를 책임맡았다.

나는 독수리반 30여 명의 6학년 남자아이들의 생활 지도와 학과 지도를 책임맡게 되었다.

한국보육원 원생들은 대부분이 6‧25사변으로 갑자기 부모를 잃게 된 순수한 전쟁고아들이어서, 우수한 어린이도 재간 있는 어린이도 귀여운 어린이도 참으로 많이 있는데 놀랐다. 그중에서도 독수리반은 참으로 깨끗하고 똘똘한 어린이들이 모인 반이었다. 이 어린이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요 젊은 정열을 불태우기에 아깝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다음날 예배시간이 돌아왔다. 큰 강당에 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반별로 줄을 지어 모여들었다. 뒷날의 이야기지만 우리는 예배시간에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들판에 나가서 마음껏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며 자유롭게 앉아서 예배드린 날도 많이 있었고, 강당에 가지런히 모여 앉아 예배드린 날도 있었다.

그날 설교하러 나선 선생님은 교육부장인 황광은 선생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저 무심히 앉아 그 설교를 듣기 시작하다가 점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도 주일학교에서 쭉 자라면서 수많은 아동설교를 들어도 보았고 또 해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흥미있고 또 심각하며 웃기고 울리면서 어린이들 마음을 마음대로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감명을 깊이 주는 아동설교를 들어보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 친구는 그날의 황광은 선생 설교에 그만 홀딱 반해 버리고 만 셈이다. 그 시간부터 나는 그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치 않은 그의 모습과 성품에 내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랜시스와 클라라를 꿈꾸며

황광은 목사의 미망인 김유선 여사는 황 목사가 서거한 후 미국으로 이민해 시카고에 살고 있다. 김 여사는 황 목사의 뜻을 이어 사회봉사 활동에 힘쓰고 있다. 다음은 김 여사가 관계하고 있는 ‘작은자 선교회’의 황화자 총무(작고함)가 김 여사에게 보낸 연하장이다.

보내주신 황 목사님의 아동복지에 대한 자료, 요즘 유관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도우시는 점순이는 아무래도 고아원으로 보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버리고 도망가고 없고, 20세도 안 된 형이 가장이며, 14살 짜리 언니가 어머니 역할을 합니다. 그 언니는 우리가 직업학교에 보낼 예정입니다. 점순이가 고아원으로 보내질 때에는 편지도 더러 보내 주세요. 외롭지 않게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세상을 밝히시는 촛불 되소서! 

황 전도사 드림.

황광은 목사 서거 10주기를 앞두고 ‘인간 황광은’을 집필하기 위해 엮은이는 김 여사에게 황광은 목사와 처음 만나던 때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때 김 여사는 글을 써주며, “반드시 문장을 고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써달라”고 했다. 그러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보다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하고 또 순수하다는 판단에서 그대로 옮겨 실었었다.

이번에도 김 여사는 그와 같은 주문을 했으나 역시 그대로 옮겨 싣기로 한다. 따라서 다음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앞에 소개한 이야기의 속편이 된다. 그리고 글 속의 ‘나’는 역시 황 목사의 미망인 김유선 여사이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상

한국보육원 생활이 시작된 첫날 예배 시간이었다. 많은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도 흥미있고 진지하게 웃기며 울리며 이야기하는 젊은 선생을 바라보며 우리는 감탄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치 않은 그의 모습과 성품에 내 마음이 자꾸 자꾸 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독수리반 아이들이 알아차린 것일까?

“황 선생님은 결혼 따위는 안 하실 거래요. 우리와 영영 함께 사실 거래요.”

이런 말을 아이들을 통해서 들을 때 나는 황 선생에 대해서 조금도 다른 마음을 품고 대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목사의 딸로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고 곱게 자랐다. 그러다가 대학 1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고, 3학년 때에는 아버지마저 가셨다. 나의 인생은 그때부터 철이 들기 시작했고, 신앙도 그때부터 독립적으로 훈련이 쌓아진 듯싶다. 대학 시절에는 무척 슬픈 경험을 했지만 그 대신 많은 좋은 친구들, 많은 사색, 많은 경험이 준 삶의 풍부함도 그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들과의 생활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이들에게 나의 전부를 주고 싶은 애정과 정열이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진숙이가 눈의 도라홈 수술을 받던 날, 무섭다고 우는 진숙이를 의사의 특별 허락으로 그 머리맡에 앉아서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너무 끔찍해 머리를 돌려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곳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아찔하는 순간 졸도해 버린 모양이다. 정신이 깨어난 뒤에 보니 수술받은 진숙이는 눈을 싸매고 있었고, 따라갔던 선생인 나는 이마를 싸매고 한 병실에 누워 있었다.

한국보육원에서의 아침 식사는 주로 우유죽이었고, 점심과 저녁은 꽁보리밥에 소금물로 끓인 미역국이 주식이었다. 어린아이들 중에는 주는 밥을 그 자리에서 다 먹어버리기가 아까워서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조금씩 꺼내 먹는 안타까운 모습도 볼 수 있었고, 들에 나가 풀을 뜯어 먹는 것을 말리기 위해 언제나 그들을 보살펴야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아이들과 함께 뒷동산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를 때면 우리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꽃가지에 내리는 가는 빗소리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 보셔요.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바다 건너 오천 리 가기만 하면

울타리에 호박 넝쿨 시들어지고

지붕 위에 흰 박들이 고이 잠드는

…………

이런 노래를 함께 부를 때면 고향 집을 생각하는 정서도 깊었지만, 전쟁의 슬픔을 잊고 아름다움을 추구해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친구들과도 산책을 즐겼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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