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1)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이기풍 목사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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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선교 박해·수난 당했지만 많은 교회 세워

감동적 설교·강의, 병 치유… 선교비 후원 받아

이기풍 목사의 선교 후원은 계속되었다. 1910년 제4회 독 노회에서 제주에 파송된 전도인이 김창문과 목포 선교부의 마틴(Miss Julia Martin:마율리) 여선교사가 두 여전도인의 선교비를 담당함으로 1911년까지 선교 활동을 지속했고,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선교에 윤함애 사모와 이선광 전도사, 마틴 양이 보낸 두 분을 합해 네 사람이 전도했다. 그 후 예배당 세 곳, 성내교회, 금성교회, 조천교회 후 예배 처소가 모슬포와 성읍리에 세워졌다. 

이렇게 제주선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도 국소관으로 선교했고 1912년 9월 전라 노회가 제주선교를 전담하게 되었다. 코이트(R.T.Coit : 고라복) 목사가 선교부의 교회들은 제주선교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전라노회에 넘어왔다. 광주 성경학교에서 1913년에 300원 이상을 약속했다. 노회도 일 년 전에 예산을 편성했다. 제주선교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으나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돌에 맞고, 홀대를 받고, 박해당하고 쫓겨났으나 교회들을 세웠다. 한때는 무섭고 게으르고 무시했던 사람들이 학식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문을 밖으로 돌릴 뿐 아니라 자기 지역 안으로도 돌려서 축호 전도하며, 전도 쪽지를 들고 복음을 전했다. 

이기풍 목사의 감동적 설교와 강의로 많은 이들이 제주선교를 후원했다. 한 여학생은 반지를 내놓았고, 무만동 교회의 김일현 장로는 보성군 무만동 교회의 설립자로서 한센병에 걸렸다가 완치되어 새 삶을 사는 신앙인이었다. 김일현 장로는 1912, 1913년에 이어서 제주선교에 많은 후원금을 냈다. 

1912년까지도 선교의 초창기였으므로 선교의 열매가 크게 나타나지 못했고, 예배당이 있는 교회도 성내, 대정읍, 조천 3곳에 불과했다. 1913년에 이르러 교회의 수와 기도처(6곳)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다만 ‘피택 장로 1인과 영수 3인, 집사 2인’이라는 점은 제주교회가 점점 조직 교회로 성장했다. 

전라남도 제주군 선교사 이기풍이 제주에 교회를 여러 곳 설립하고 수고 많이 하시다가 금년에 5~6개월 쉬려고 그 부인과 자녀 3명을 데리고 상경해 5월 3일에 연동교회로 와서 그 밤 3일 연동교회가 남녀 중학생과 여러 형제의 의복과 물품을 보내신 것으로 제주에서 큰 사랑과 큰 유익을 받았으니 새로 믿고 열심히 주를 섬기는 자가 60여 명이 되어 전에 90인이 모이던 예배당은 지금 150여 명이 예배 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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