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호는 손끝을 기역자 모양으로 꾸부려서 그 위에다 비가를 올려 놓았다. 호주머니 속에서 밖으로 꺼냈다. 마치 스키장의 케이블카처럼 올라탄 비가가 옆구리를 지나 가슴 위를 거쳐 입가로 올라갔다.
순간 눈깜짝할 사이에 비가는 입 속으로 이미 들어갔고 손은 이마를 거쳐 뒷머리를 천연덕스럽게 매만지면서 제자리로 내려갔다. 비가 맛이 기가 막혔다. 원래가 스릴이나 불안감이 크면 클수록 통쾌함도 더한 모양이다. 박격포의 제원(諸元)으로부터 사거리(射距離)에다 폭파 범위에 이르기까지 교관의 말이 귓속으로 쏙쏙 들어왔다.
이와는 정반대로 주위의 동기생들은 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이란 만물상이었다. 이러니 일일시험(日日試驗) 만점이야 땅짚고 헤엄치기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순호는 갑자기 움찔했다. 어느새 왼손이 또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비가종이를 벗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안되지 내가 비가를 먹는 까닭은 잠을 깨기 위해서 분명코 먹기 위해서가 아닌데.’ 손을 얼른 빼서 책상 위에다 올려놓았다.
‘하기야 한 개나 두 개나 먹는 것은 마찬가지지 기왕 돈주고 산 것 내가 먹는다는데 누가 뭐래?’ 순호는 히죽 웃으면서 다시금 비가를 벗기기 시작했다. 한번 해보았던 것이라 요령이 생겨서 아주 간단하게 벗겼다. 서서히 호주머니에서 나온 손은 옆구리를 지나 가슴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팔목이 콱 잡혔다. 이순간 순호는 껑충 뛰다시피 기절하듯 놀랬다. 어느새 등뒤로 슬그머니 와있던 수업감독장교가 손목을 잡은 것이었다. “학과가 끝나거든 나에게로 왓!”
비록 얕은 목소리로 하는 귓속말이었지만 순호에게는 스피커 바로 앞에서 듣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맙소사!’ 만사가 끝장이 난 심정이었다.
수업이고 성적이고 그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순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수업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걱정이 심했다. 순호는 학과가 끝난 후 끌려가는 소처럼 목을 쏙 빼고는 구대장실로 들어섰다. 수업감독관인 방 대위가 영락없이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순호 후보생! 학과시간에 사탕을 먹다니!” “네! 잠을 깨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번 사탕은?” “그런… 그건 그냥 있었기 때문에 먹었습니다.” 방 대위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완전무장하고 연병장 20바퀴 구보실시!” “네! 20바퀴 구보실시!!” 순호는 큰소리로 씩씩하게 복창을 하고는 뒤돌아서 나왔다. 순호는 히죽 웃었다. 뛰었다 하면 으레히 40바퀴를 돌리는 방 대위가 뜻밖에도 20바퀴라는 기적같은 횟수를 언도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렇지 초범(初犯)과 재범(再犯)은 같을 수가 없지. 한 개로 그쳤어야 했던 걸. 두 개나 먹으려고 했으니….’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