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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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난지도 삼동 소년시 ②

행복의 순간 ‘폭풍 전의 적막’

희생으로 주님 뒤 따르려 결심

예수님 3년 간의 전도에 필적

김춘배 목사 집례, 결혼식 거행

아, 그대는 누구요?

사진 찍은 것 잘 안 되어서 그것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명일 다시 찍어서 신 집사 편에 기독교서회로 보내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 돌아올 때까지 건강해야 합니다. 돈은 꼭 내가 내려가서 고기하고 점심을 사 먹이려고 했던 거니까, 내가 떠난 다음에 내려가서 꼭 무얼 좀 사 먹어야 합니다. 갔다 와서 미스 리에게 다 물어볼 테니까 속이지 말고 꼭 좀 뭘 사 먹어요!

그리고 어젯밤에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결혼하기가 앞날의 일을 위해 거리끼거든 지금이라도 말해주면 내가 어떻게 좀 물려서 몇해 후에 하도록 해볼테니 생각 달리해 보도록 해도 좋아요.

난 지금의 입장으로선 안 할 수도 없고 두렵기도 해요. 내 몸에 가진 옷까지 홀딱 벗어 버릴 수도 있는 내 심경은 유선이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 내 하나밖에 없는, 앞으로 영원의 반려인 그대를 버리고 내 앞길만 생각할 수 없으므로 난 꼭 두 사람의 일을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도 이번밖에 없고 또 늘 이런 기분으로만 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부르심을 받으면 용감히 발벗고 나아갈 앞날을 위해서는 요즈음의 행복스러운 순간은 폭풍 전의 적막일 것입니다.

유선이는 도리어 내 이러한 용감한 감정이 식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아요. 그러나 내 결코 내 몸을 부수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결심은 잊지 않습니다. 유선이가 날 낙오자 되지 않게 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남들도 걷는 길이니 걷는다는 데서 떠나서 좀더 심각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둘이서 지기 위하여 결혼합시다.

나는 내 모든 주위와 환경을 희생해서 어느 정도 3월에건 4월에건 하려면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요.

그것은 내 십자가를 빨리 지려고 하는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10년, 그것은 예수님의 3년간의 전도에 필적할 것입니다.

우리 두 몸 묶어서 남을 위해 살아 봐야지.

당신도 이 기회(언제가 될는지는 몰라도)에 당신의 가정과 내 가정에 사랑과 정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한번 만들어 봤으면 좋겠어. 눈멀고 늙은 아버지가 한번 어루만져 보고자 하는 우리의 가정은 어머님이 없어서 섭섭은 하지만 퍽으나 당신을 기다려요.

그리고 우리의 사업은 퍽으나 모험성 있는 일이야. 그래서 둘이 다 뛰어들어야 할 때도 있겠지만, 난 유선이 조용히 가정을 지키고, 엄마가 되고, 좀 이상적인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리고 한얼중학을 찾아가 보고 싶은데, 조향록 씬 알아도 혹시 찾아볼 사람 있나요? 그리고 어디로 가지? 안녕.

1952년 1월 19일에서부터 결혼하기 전날인 4월 15일까지의 일기 가운데서 몇 대목을 가려뽑아 읽어 보는 것도 황광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월 19일

클라라의 긴 회고. 저 달이 지기 전 놀다 가요! 한라산은 달빛에 어리고, 비는 밤새도록 주룩이는 두 사람만의 밤, 고아들에게 이 밤을 선사해야 할 터인데.

2월 25일

서울의 거리는 죽음의 거리였다. 파괴된 터 위에 흰눈만이 서글프고, 사람의 그림자 희미한 본정을 거닐다 생각하니 오늘이 내 생일이다.

 난지도! 꿈에 그리던 난지도.

 허허벌판에 포플러가 자라고 있는 난지도. 난지도는 황폐했으나 이름이 난지(蘭芝)도다. ‘보이스 타운’을 여기 건설한다면 될 만한 일이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워했건만 집은 무너지고 땅은 거칠었다. 그러나 늙기는 더했어도 옛 사람들의 얼굴은 그래도 알아볼 만하다. 반가워하면서 경계하는 농민, 거기에 내 일터가 기다릴까?

3월 11일

밤! 두 사람의 밤. 거기다 예수까지 세 사람의 밤이라면. 눈이 말하고, 손이 말하고, 가슴이 따뜻이 말하고 그리고 그것들이 말을 또 들으니.

4월 13일

부활주일 아침. 새벽 찬송, 촛불 예배, 모두 재미있는 순서였다. 그러나 클라라가 없으니 밝은 달도 심상하다. 하나님을 믿는 내 마음도 어쩐지 허실부실한 마음인가 보다. 내 믿음이 어디 있는가? 대답해 보라!

4월 19일 

26일날 결혼이니 빨리 나오라는 전보가 왔다. 막상 닥치고 보니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자꾸 그리로 끌려 가는 것이 사실이다. 삼십에 나서도 아직 마음이 어리다. 어린애처럼 생각되는 내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건 참으로 거북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집에 대하여 무엇을 했으며, 내 부모에 대하여 무엇을 했는가. 어머니가 그렇게 며느리를 보고 싶어하다가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한 것이 무엇일까. 아버지가 인제는 결혼하라고 인정을 내리니 내가 무엇으로 대답할 것인가? 단 한 번의 단 하나의 효도의 길이 있다면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다.

4월 25일

나는 흰옷을 입고 결혼식에 참석할 것과 미스 김은 화장도 않고 면사포도 쓰지 않고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창식 형과 함께 면사포를 만들었다. 천 한 마에 철사로 꼬부려 붙이고 벚꽃을 꽂았다.

1952년 4월 26일

1952년 4월 26일, 신랑 황광은과 신부 김유선은 부산 중앙교회에서 김춘배 목사 집례로 결혼식을 거행했다. 신랑측 들러리는 한국신학대학 동기동창인 이일선(李一善)이었다.

그 결혼식에 대해서 김유선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전시 때였던 만큼 신부는 면사포도 쓰지 말고, 미장원에도 가지 않기로 하고, 우리는 꼭같이 무명으로 한복을 해 입었다.

그날 아침 식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거 어젯밤 이창식 씨와 둘이서 자지 않고 만든 것이니 어디 써봐요’하면서 내 앞에 내놓는 것은 바로 면사포였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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