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경남 함양의 마천고을은 신라시대부터 있던 역사 깊은 고장이다. 이원수 작사의 ‘고향의 봄’ 동요가 어울리는 고장이다. 이 무릉도원 마천 산골에 해주 오씨 한 분파인 나주 오씨 오양원 어른이 조선조 영정조 시대쯤 들어와 도촌에 정착했다. 부자로 살면서 인자하고 어진 마음씨로 선을 많이 베풀고 이웃사랑 실천을 잘 했다. 사랑채 방에는 선비 묵객 식객이 3년 5년까지 그냥 머물다 가곤 했다.
한번은 식객 하나가 5년이나 공짜로 신세지고 가면서 주인 어른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려는 모습이 아들 눈에 띄어 그 식객의 무례함을 나무라 주었다. 그 식객은 그 사랑에 보답하는 뜻으로 창암산 정상에 묘자리 하나를 알려 주었다. 마천에 다섯 개 명당 묘자리가 있는데 식객은 그 가운데 하나인 창암산 정상 아래 상투바위 옆 묘자리를 알려준 것이다.
푸른 하늘 해처럼 밝게 도촌 마을 앞을 흐르는 맑은 냇물처럼 양심 맑고 곱게 선심 쓰고 살아간 오양원 어른이 별세하자 도촌마을 건너 강청마을 청년들이 상여꾼이 되어 923미터 높이의 창암산 정상 바로 아래 상투바위 옆까지 상여를 메고 갔다. 식객이 일러준 하관 시간은 오후 3시 근처 쇠우산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일 때 하관하라 했다. 믿기 어려운 맹랑한 일이었다. 삿갓을 쓴 사람이 지나간다면 몰라도 쇠우산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후 3시가 될 무렵 그 푸른 가을 하늘에 검은 구름 몇 점이 하늘을 일부 가리더니 그 아래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게 아닌가. 그때 난데없이 나타난 여인 하나가 솥뚜껑을 거꾸로 쓰고 명당 산소 옆을 지나갔다. 바로 이때다 생각한 상여꾼들이 하관을 실시하고 오양원 어른의 무덤을 크게 만들었다. 우뚝 솟은 창암산 정상에는 비녀바위가 서 있고 조금 아래쪽에 상투바위가 서 있다.
그러므로 명당 산소의 약점은 나주오씨 집안에 과부가 많이 나와 무덤을 파헤칠 우려가 있으니 흙에 횟가루를 섞어 무덤을 단단히 쓰라 했다. 상여꾼들은 그렇게 했다. 그 명당은 7대손 장군대좌설이었다. 마천에 철마가 들어오면 장군이 오씨 문중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기차는 들어올리 없고 버스길은 트여 마천이 현대화 되어가도 10대손에 이른 현재까지 오씨 문중에 장군은 나오지 않았다. 쇠우산 전설의 산소에 얽힌 말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방의무 다하기 위해 입대한 병장들은 많이 나왔다. 장군으로 봐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더욱 뜻깊은 일은 땅끝까지 전도하라는 전도의 사명을 다하는 믿음의 일꾼으로 목사 장로 권사들이 배출되어 집안은 물론 세계 선교에 앞장서 있다. 바야흐로 하늘나라 하나님 말씀을 나라 안팎으로 전하는 믿음의 장군들이 나주 오씨 문중에서 계속 배출되고 있다.
오양원 선조께서 영정조 시대부터 열심히 베푼 선행과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셨기에 나주 오씨羅州吳氏 집안에서 땅끝까지 복음전파하라는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해 가고 있다. 미신이 많아 복음화가 늦던 마천도 이제 교회가 다섯 개가 서 있다. 오양원 선조 어른의 명당 산소가 있는 창암산도 항상 아름답게 마천(馬川)을 지키는 등불처럼 서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