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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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난지도 삼동 소년시 ⑧

불행한 사람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분

거칠고 비정상 아이들도 양처럼 순해짐

200여 명 식구들 식량 감당… 주된 임무

명절·크리스마스, 시민들 함께 음식 나눠

삼동 소년시 시민들은 오전 공부가 끝나면 일터로 나가서 오후 다섯 시까지 일을 한다. 농림부 소속 시민은 개간지로 나가서 논밭을 일구고 감자나 땅콩 또는 고구마 따위를 심어 농사지어 추수 때면 거두었다. 또한 국방부라 할 수 있는 사령부 소속 경비원은 사냥꾼이 섬에 들어와서 꿩 등 밀렵을 하거나 기타 농작물에 손해를 끼치는 일을 방비한다. 촌과 촌 사이의 편지 연락은 체신부에서 담당한다.

큰형님의 고아 사업은 사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아 사업과는 정말 판이했습니다. 구호물자나 횡령하여 개인의 치부나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큰형님은 KY에서 한 어린이 설교나 동화 동시의 원고료, 목회 강단에서의 수입까지 전부 난지도에 털어 넣었고, 하루 세끼를 밥에서 반찬까지 우리들과 같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큰형님을 따랐지요. 그는 우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 우리처럼 불행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렇듯 뒷날 삼동 소년시 출신의 시민들은 황광은 형을 따랐으나, 막상 소년시를 건설하던 그 당시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았다. 그는 그 어려움에 대해 죽는 날까지 끝내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 무렵 소년시에 살던 시민들의 입을 통해 그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말없이 해냈는가 하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우선 난지도 삼동 소년시에 모여든 200여 명 소년들의 형편을 살펴보자. 그들은 향린원 원생들처럼 순수 고아도 아니었고, 한국보육원 원생들처럼 전쟁 고아도 아니었다.

 소년 교도소에서 넘어온 17~18세 짜리 청소년이 70여 명, 서울시경에서 잡아온 양아치들이 80여 명, 순수한 전쟁 고아는 30여 명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6‧25사변 이전부터 있던 20~25세의 이른바 ‘장형’이 20여 명 있었다.

그러나 보통 열의와 실력과 재주로는 그들을 다룰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말할 수 없이 거칠고 비정상적인 아이들이 대다수였지만, 광은 형 앞에서는 양과 같이 순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2,30여 명 아이들에게 옷을 갈아 입게 하는 것은 김유선 여사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나 말썽을 부리는지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변소에 처박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김 여사가 환멸을 느끼면, 황광은 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고 좋은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를 잘 몰라서 그렇소.”

이런 자세가 되어 있었기에 황광은 형은 그 문제아들을 잘 이끌어 10만 평의 넓은 자연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배우며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매력있는 친근한 형이었다. 그가 서울 시내에 외출을 하게 되면 여러 꼬마 시민들의 요구를 꼭 들어 주곤 했다. 호루라기를 사다 준다든지, 하모니카를 구해다 준다든지, 시계줄을 바꾸어 준다든지 하는 일을 해 준 것이다.

때문에 광은 형이 외출한 날이면 전체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고 재미없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나타나기만 하면 생기가 돌고 활기띤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난지도에 가려면 수색에서 버스를 내려 도보로 30분 가량 걸어서 한강 하류에 다다르면 나룻배를 타야만 했다. 나룻배에서 내리면 코스모스 만발한 오솔길이 쭉 뻗어 있었고 높다랗게 ‘오며 감사, 있어 감사, 가며 감사’라는 푯말이 크게 눈에 띈다.

삼동 소년시 동산 안에 들어서면 약간 높은 언덕에 교회가 서 있고, 그 앞마당 약 500여 평 되는 옥토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였다. 각 촌 주위에도 경쟁적으로 저마다 꽃밭을 가꾸었기 때문에 마을 전체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여름 한 철은 각 교회 학생회라든가 미션계 학교에서 캠프장으로도 이용하였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게 되니 그곳 생활은 자연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200여 명 식구란 결코 적은 식구가 아니다. 먹는 것이 문제였다. 주식인 쌀은 귀했으나, 여름철에는 아이들이 잡곡과 채소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감자, 토마토, 강냉이, 호박, 무, 배추 등 가지가지 채소를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

가을 김장철이 되면 200여 명 식구라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려 많은 김장을 해서 저장해야 했다. 그리고 YMCA 직원들의 김장용으로, 또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서 많은 양의 배추가 서울 시내로 실려 나가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시중에는 개량 메주가 없었는데, 김 여사는 황곡이라는 효소로 메주를 만들어 그것으로 200여 명의 대식구가 먹을 간장과 된장을 만들었다. 사실 말이 쉽지 한 여자의 힘으로 200여 명의 된장 간장을 직접 만들어댄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채소가 없는 겨울철이면 콩나물움을 만들어 계속 콩나물을 생산해서 부식으로 충당한 것도 김 여사의 일이었다.

식량은 언제나 부족해서 가능한 수단을 다하여 쌀을 사서 보태는 것이 황광은 형의 주된 임무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추석 때가 되면 녹두지짐을 만들어 함께 먹었고,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떡을 해서 온 시민이 함께 명절 기분을 냈다. 그 일 또한 보통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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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 소년시 제3대 시장을 역임한 김용호 씨는 연령관계로 1957년에 난지도에서 나온 후 낮에는 YMCA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일생을 바쳐 청소년 운동을 하고 있다. 현재 포항 YMCA 총무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울산에 회관을 건축하는 것이 꿈이다. 그는 그 일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예전에 소년시를 위해 힘썼던 사람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다음은 김용호 씨의 글 가운데 일부이다.

1996년 무덥던 어느 여름날, 나는 아주 작은 기적을 체험했다. 그것은 40여 년 전에 내가 생활한 보이스 타운을 창설해준 사람 중의 한 분인 이재원 씨라는 재미동포가 전화연락을 해준 것이다. 그분은 나를 만나더니 보이스 타운을 창설하던 당시의 이야기며, 미군 제5 독립연대가 몰살하다시피한 전투에 관한 이야기며,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현재도 제5 독립연대의 생존자들이 미국 안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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