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귀의한 후 절대 신앙인으로 거듭나
순수 성도들 헌금으로 교회 건축… 확실한 자립
명칭을 ‘장로교 수양관’이라 하지 않고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이라 했다. 이렇게 이름한 것은 여러 교파가 공동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10년 계약이었으므로 1941년 일본인들이 철거하고 말았다. 초석에 있던 한 목사 자작, 자필의 정초문(定礎文)은 현재 기독교 박물관에 진장(珍藏) 보관됐다.
1937년 한 목사는 자녀들의 도움으로 서울 당인리(唐人里)에 간소한 가옥을 신축하고 도화동에서 다시 이곳으로 이사했다. 한 목사는 서울에 살면서 평양 장대현 교회 분규 사건을 조정할 사명을 띠고 잠시 평양으로 간 것이 만년에 관계한 일 중의 하나였다. 한 목사는 말년에 간경화로 고생했다. 말년을 금강산 수양관에서 휴양하려고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인과 함께 금강산으로 갔다. 그러나 일주일 만에 서울로 되돌아왔다. 채필근 목사가 편찬한 ‘한석진 목사와 그 시대’에는 한석진 목사를 “본시 실행가요, 활동가였고 학자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상 없이 실천과 신념없는 활동이 어떻게 크고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으랴”고 기록했다. 한 목사는 성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으며,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전도할 때도 복음을 믿어 구원받고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애국 운동을 한 때도 있었다. 그는 순간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아니었다. 몇 차례 망설임이 있었다. 매우 신중했다. 그것은 유교와 불교에서 실망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귀의한 후에는 절대 신앙인이 됐다.
그는 전도에 탁월했다. 이것은 구원받은 확신에서 나왔으며, 또 인간을 사랑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므로 신학교 동창들을 전도했다. 남강 이승훈이 한일 합방된 직후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란 설교를 들었다. 그 설교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 모세의 출애굽,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 내용은 민족의 현실이었다. 그의 설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민족의 심정을 드러내므로 남강 이승훈에게 놀라운 감명을 주었다.
또 그의 능력은 건축이었다. 장대현교회, 장천교회, 안동교회, 마산교회, 신의주 제일교회 그리고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을 건축했다. 그것도 성도들의 헌금과 자기의 설계도에 의해 건축했다. 더욱이 외부나 선교사들의 도움이 아니라 순수 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지었다. 금강산 수양관을 건축하기 위하여 제주도까지 가서 모금 운동을 벌여 완공했다.
한석진 목사가 선교사 반대 운동한 흔적이 있으나 그것은 선교사 배척이 아니라 선교 방법의 개선을 주장한 것이었다. 한석진 목사는 마펫 선교사에게 전도받아 예수 믿은 후 세례받았으며, 그에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목사가 됐다. 마펫 선교사와 협력해서 평양을 중요한 선교 구로 수립했으며 게일 목사가 재혼할 때 주례를 했다.
한 목사는 한국교회가 한국인의 지도로 부흥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토착화요, 민족교회 형성이었다. 그는 선교사에게 봉급을 받지 않았으며 교회를 건축하고 수양관을 건축할 때도 모금이 어려웠으나 한국인의 헌금으로 감당한다는 주장이었다. 한석진 목사는 한국교회가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혁가였다. 그래서 총회에서 헌법을 제정한 일이 있었으나 교회는 법에 매인 기관이 아니라 법 없이 바르게 개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