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3)  영계(靈溪) 길선주 목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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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부흥 운동 거장, 독립 운동의 대표적 주역

젊은 시절 10년간 차력 연마·문하생으로 선도 수련

길선주 목사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의 한 사람’으로 조선 기독교의 인물이라 부를 수 있다. 한국교회 부흥 운동의 거장 ‘길선주’ 목사는 대표적 부흥 운동인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이었다. 

길선주는 1869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 후장동에서 길봉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윤열’, 호는 ‘영계’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시(詩) 화(畫)에 능하고 음악을 좋아했다. 그의 집은 가난했다. 수리하지 못한 초가집은 쓰러져 가고 마음은 한없이 우울했다. 자기만 그런가 하면 동무들의 집이 모두 그러해서 더욱 질색했다. 선주는 열두 살에 서재에서 나와 안주 부사의 통인이 됐다. 관가는 넉넉한 줄 알았는데 거기도 돈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도 이웃에도 관가에도 가난한 것을 본 선주는 몹시 안타깝고 서글펐다. 차라리 새가 되었더라면 마음대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먹고 싶은 것을 먹어볼 것을, 차라리 꽃이 되었으면 아무 근심 없이 예쁜 옷을 입어보련만 타령을 해보기도 했다. 

이때 선주는 이웃집에 시집 온 새색시가 가난과 싸우는 가련한 모습을 보고 ‘빈부 시’ 한 구를 지어 가난이란 운명을 탓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새색시의 설움만은 아니었다. 선주와 그 이웃과 나라의 설움이었다. 선주는 가난을 극복하는 길은 돈을 버는 데 있다고 하여 푼푼이 모은 돈 얼마로 장사했다. 20살이 되도록 장돌림 노릇을 하며 갖은 애를 썼으나 여전히 가난했다.

길선주는 고려 말 유학자 야은 길재의 19대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영성과 감성이 예민하여 12세에 주위를 놀라게 한 한시를 지었고, 청소년기에 인생의 고뇌에 빠져서 구도자로 방황했다. 그는 젊은 시절 근 10년간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는 관성교에서 창일 도사인 김순호의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을 외우며 차력에 도통했고 그 후 평양의 도사인 장득한의 문하생으로 선도(仙道)를 수련했다.

선주는 11세에 신선달의 외동딸 ‘신선행’과 결혼하고 17세 때 평양 용악 산기슭에서 관성교의 차력술을 연마했고, 25세에 친구와 선도에 입문하여 입산 수행했으나 3년 만에 실패했다. 선도를 권한 ‘김종섭’이 마펫 선교사로 기독교에 입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권하는 ‘장원양우상론(長遠兩友相論)’과 ‘천로역정(Pilgrim Progress)’을 읽고 감명했다. 장원양우상론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중국 선교사 윌리엄 밀른(William Milne)이 지은 19세기 동아시아 베스트셀러 전도지였다. 천로역정은 17세기 영국의 작가이며 침례교 명 설교가인 존 번연의 우화 시리즈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기독교의 책이었다. 그는 ‘그리스도 신문’의 언더우드 칼럼을 읽고 감동했다.

길선주는 기독교를 연구하려고 중국 성서 공회에서 발행한 관주 신약을 읽기 시작했다. 관주를 보다가 구약도 읽으려고 한문 구약성경도 사고 성경 주석과 그 밖의 기독교 서적도 구했다. 당시 한글로 된 기독교 서적이 없었고 그는 한문이 이해하기 쉬웠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전설이나 신화 같기도 하고 심지어 무당의 독백 같아 종잡을 수 없고, 불교와 같이 오도의 지름길을 설파하거나 유학처럼 깊은 인륜 도덕을 논한 것도 아니고 신도의 주문처럼 신비의 묘리를 제시한 것도 아니라 아리송한 내용으로 표현은 쉬운데 읽기는 어려웠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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