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일 (4)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그토록 능력 있게 말씀을 전하던 김 중사는 제대 후, 서울 충무교회에서 봉사하던 중 개척교회 시찰을 나갔다가 그만 횡성 부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하나님 품으로 가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마흔을 갓 넘겼었기에 그의 죽음은 내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생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새롭게 깨닫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기억 너머에 있던 그를 다시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 사건이 있었다. 총회 사회부 재직 시 연금재단의 활성화를 위해 투자방법을 물으려 명동지점 외환은행에 업무를 보러 갔을 때이다. 창구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의 말투를 듣던 그가 자신의 아버지도 북쪽에서 태어나셨다며 나를 친근히 대해 주었다. “아버지 고향이 어디신가?” “정주입니다.” “정주? 나도 정주가 고향인데….” 믿을 수 없게도 그는 김진평 중사의 아들이었다.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
하나님은 나를 다시 3사단 군인교회로 보내셨다. 사단 군목부 이삼열 상사가 군종감실 선임하사로 전속하면서 나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연대에서 사단군인교회(군목 조덕현 목사)의 선임하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주에 1군 사령부가 창립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의 군목부장으로 유명한 목사가 부임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사단에 온 지 6개월 밖에 안 된 시점에서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염치없는 짓인 줄은 알지만 저를 제1군사 군종부의 황금천 목사에게로 보내 주십시오. 평생 교회를 바로 섬기기 위해서 유능한 목사님 밑에서 주의 일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주님, 꼭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두 번 다시 이 일로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뜻이면 보내 주십시오.”
기도를 하고 그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지내고 있었는데, 한 달 뒤 크리스마스 행사 준비로 바쁜 어느 날 공식 명령이 떨어졌다. 1군 사령부 군종부로 가라는 상부의 명령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군종감실 이삼열 상사가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 염치없다 여겼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자 뛸 듯이 기뻤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성탄절 행사를 마친 다음 날, 1군 사령부 본부중대에 가서 전입신고를 마치고 군종부장 황금천 목사께 인사를 드렸다. 3사단 군종하사들에게 들은 대로 황 목사는 거구에 목소리도 우렁차고 호탕한 분이셨다. 그 후 나는 황 목사가 총회 전도부 총무로 부임하기까지 그에게 신앙지도를 받은 것은 물론 여러 가지 교회일과 사무를 배우게 되었다. 또한 그 기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 감리회 소속 목사와 가톨릭 신부를 모시면서 국내 교파와 서로 간의 감정을 알게 되었고, 또 모든 군목은 1군 사령부 군종부를 통해서 배치되었기 때문에 많은 군목을 알게 되었다.
얼마 후에 1군 사령부는 신남에서 원주로 이전하였고, 이때 각 부처 선임하사들은 영외 거주가 허락되어 나는 사령부 근처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하숙하던 집주인 할머니는 벽에 못을 박는 날짜까지 점쟁이에게서 받을 정도로 무속신앙에 빠져 있는 분이었다. 도저히 전도를 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중학생 손자가 내게 뜻밖의 질문을 했다. “다른 군인들은 부대에서 이것저것을 가져다 팔아서 용돈을 버는데 아저씨는 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요?” 나는 이때다 하고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군인교회 선임하사다.” 그 후 그와 자주 만나면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사용하신 지갑용 성경을 그에게 주었다. 그 학생은 후에 1군 사령부 근처 호저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원주 시내에 있는 제일교회, 중앙교회와 감리교회에 출석할 기회가 생긴 것이 매우 기뻤다. 그동안 민간교회 예배에 참석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부흥사경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동신교회 담임인 김세지 목사가 원주제일교회에 강사로 오셔서 스데반 집사 이야기를 전하셨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일어서 스데반의 순교를 굽어보시며 도우셨다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내게 평생 잊히지 않는 감동을 주었다.
빈틈없이 나를 이끄셨던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은 수년에 결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3사단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조덕현 목사의 후임으로 오신 김성묵 목사가 내 손을 잡더니 부탁이 있다는 것이었다. “실은 연세대학교를 다니던 동생이 6.25 때 북쪽으로 납치되었다네. 정 상사를 보니 내 동생과 어쩐지 닮은 구석이 많더구먼. 그러니 정 상사, 앞으로 내 믿음의 동생이 되어주게나!” 나는 감사의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저야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저는 무매독자라 외로운 처지인데 목사님이 제 형님이 되어 주시면 이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럼 우리 같이 기도하세나.” 김 목사는 내 손을 붙잡고 이렇게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 정 상사를 보니 동생 생각이 간절합니다. 이 시간 이후로 정 상사를 믿음의 동생 삼기로 했으니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그를 지켜 주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인도해 주십시오.” 그 뜨거운 기도의 응답은 내가 제대를 한 후에 일어났다.
7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53년 7월, 남북 간에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군에서는 희망자에게 만기 제대를 허락했다. 나는 기도하는 중에 신학교를 가기 위해서 제대를 결심했다. 그리하여 1955년 3월 20일, 7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1군 사령부 본부 중대에서 만기 제대를 하였다.
제대와 관련하여 조금 씁쓸한 기억이 하나 있다. 당시 일등상사 제대비로 1만3천 환을 받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같이 복무하던 군종부 사병 한 명이 내게 제대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아 둔 돈이 있으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저희 집이 강화도인데 집이 넓어서 돼지를 키우고 있습니다. 한 마리 사 키워서 제대 후 팔아 쓰시는 게 어떠십니까?” 나는 그를 믿고 8천 환을 주었고, 그는 휴가를 나갔다가 복귀해서는 돼지 한 마리를 사서 고향 집에 맡겼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의 손목시계가 새것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제대할 때 돼지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제대를 준비하면서 대한신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1군 사령부 군종부에 전속한 직후였다. 나는 부흥사가 되고 싶었다. 그때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알기는 알되 바로 믿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긍휼이었다. 시간만 나면 믿지 않는 전우들을 찾아갔던 것도 바로 그 마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전도를 하며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전도를 무척 기뻐하신다는 것이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