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30년 전에 로마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 성 베드로 성당의 규모나 각종 고각품, 앞마당의 원형으로 된 회랑 기둥 등 놀랍고 감탄할 것이 많았지만, 제 아내(千永春 권사)는 성당 안 모퉁이에 있는 피에타를 보고 제일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만든 성모마리아가 무릎 위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받아 안고 있는 조각품으로 어머니의 사랑과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1475-1564)는 “모든 돌덩어리 안에는 조각상이 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조각가의 임무다”란 말을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같은 성화(聖)를 그린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다비드(다윗)>와 <피에타>를 만든 천재적인 조각가이기도 하다. 그 자신은 ‘화가’보다 ‘조각가’로 불리우고 싶어 할 정도로 조각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작품들은 대리석에 갇혀있는 인물을 퍼낸 것처럼 하나하나에 생동감이 넘쳐나고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조각상 <피에타/Pieta>는 미켈란젤로의 인생 최대 걸작품이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를 그린 그림이나 조각품”을 가리킨다. <피에타>는 1290-1300년 경 독일에서 만들어진 ‘저녁기도의 조각상’(Vesperbild)이 시초다. 성모마리아의 애도가 해 저물 무렵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일의 수도사들은 죽은 예수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 나무상(像)을 만들어 저녁시간에 기도를 드렸고, 그래서 독일에서는 ‘저물 무렵’을 의미하는 “Vesper”를 붙여 나무상의 이름을 ‘베스퍼빌트’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1400년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이탈리아에 와서는 ‘피에타’(Pieta/자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여러 사람이 ‘피에타’를 만들었지만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역시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에타’일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3개의 피에타를 만들었다. ①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②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있는 피에타 ③ 스포르 체스코 성에 있는 론다니니 피에타가 있다. 노안으로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촉각에 의지하여 죽기 6일 전까지도 피에타를 제작할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이는 그가 6살 때 어머니를 여윈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세 작품 중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1499년 당시 24세였던 미켈란젤로가 랑그오사이오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그의 무덤을 장식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미켈란젤로 자신도 이 작품에 만족했는지 유일하게 이 작품에만 직접 서명을 남겼다. 높이 174cm의 이 조각품은 대리석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성모마리아의 옷주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성모마리아의 무릎에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손의 핏줄 하나하나까지도 매우 생생하다. 마치 행위예술가 사람이 앉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지면 곧 움직일 것 같고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렇게 피에타에는 고요하고 절제된 슬픔을 간직한 성모마리아의 모성애가 느껴진다. 아들이 죽은 끔찍하고 처절한 상황을 너무나 차분하고 고요하게 표현하였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 그리스도는 평안히 잠든 모습이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마리아는 마치 기도하는 모습이다. 관람자들은 ‘통곡하는 마리아보다 더 슬퍼 보인다’고 말한다.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는 극진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은 아들의 마지막 체온이라도 느껴보려는 듯한 마리아의 모습, 성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육체의 극한 고통을 견뎌야 했던 예수님을 보게 된다. 그 모자의 너무도 담담한 모습이 오히려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어갈 때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어 태양도 어두워졌을 것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자녀를 앞세워 보낸 사람들은 피에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실현한 곳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정유진 글 참고).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