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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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2)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일주일 후, 황 목사를 찾아가 사무실을 지킬 수 없다는 내 뜻을 밝히고 전도부를 그만두었다. 사직서라는 것도 없고 구두로 의사를 전하던 시절이라 그 후로 나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 후, 당시 영등포교회 이영희 목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 목사가 통합 측 전도부장이 되어 나를 다시 통합 측 전도부 직원으로 부른 것이었다.

황금천 목사와 헤어진 것은 내게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그분 곁에 있고 싶어 하나님께 염치없는 기도를 드렸을 만큼 나는 그분을 좋아했고, 그분 역시 나를 매우 아껴 주 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총회로 불러 주신 분이 아닌가. 그처럼 깊은 관계에도 내가 황 목사를 따르지 않은 것은 복음주의가 분열을 주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황 목사는 합동 측(홍성교회 시무)의 큰 어른으로서 제62회 총회장까지 지냈다.

총회 간사가 되어 시작한 기록문화

분열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아 모든 행정 체계나 처리가 허술하던 때, 주님은 나를 총회 본부의 간사로 보내셨다. 내가 알기로 총회의 재정은 몹시 어려웠고, 지교회들도 통합과 합동사이에서 자신들의 행보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혼란의 시기였다.

총회 총무에 대한 예산이 따로 없었기에, 교회를 시무하는 목사님이 겸임하고 계셨다. 당시 서울 용산교회 유호준 목사가 총회 총무를 맡았고, 경리는 교육부 김암 장로가 맡았다. 유 목사가 오기 전에는 교육부 총무인 안광국 목사가 총무를 겸임했는데 김암 장로가 모든 간사일까지 도맡아 하다가 유 목사가 총무가 되면서 임시직원으로 용산교회 유익 장로를 임명했다. 

어려운 것은 총회뿐만이 아니었다. 총회 본부에 의무적으로 내게 되어 있던 회비조차 납부가 어려워 여러 노회에서 ‘상납금 면제 청원’을 제출할 만큼 지교회들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총회 회계는 돈을 많이 빌려올 수 있는 회사를 경영하는 장로들이 되었다.

당시 총회는 재정이 가장 튼튼했던 교육부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교권은 안광국 목사와 김상권 목사에게 있었고, 통합 측 안에서도 호남일부·이북세력과 영남세력이 긴장 속에서 경쟁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에는 총회 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았고, 총회 회록도 출판이 되지 않은 때였다. 총회 기간이 주일을 끼고 일주일간이었으나 종합된 보고서와 직전 총회 회의록도 없이 회의를 진행했기에 진행에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었다. 나는 총회 서기와 총무의 승인으로 총회 회의록과 총회 순서를 포함한 총회 보고서를 작성하여 출판하기 시작했다. 또한, 두루마리 7장으로 된 긴 총회 순서지 틀을 과감히 버리고 단면으로 총회 순서지를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리고 각 부 보고서와 각 노회보고서 및 통계표가 포함된 종합보고서를 따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총회 회록을 만들었다. 1천2백 쪽에 달하는 요즘 총회 회록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이 보이는 100쪽 남짓의 얇은 회록이었지만, 공식적으로 총회 ‘기록’ 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기록문화의 기초를 세워 총회 사무행정의 체계화에 기여했으며, 무엇보다도 총 회의 역사를 자료로 남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나는 총회에서 타자기를 사용한 첫 사람이기도 하다. 따로 타자학원을 다닌 적은 없었지만 다섯 손가락을 다 사용하여 공문을 작성할 만큼 혼자서 힘을 다해 노력했었다. 각 노회와 전국 교회에 보내는 모든 공문은 국문으로 통일했고, 공문은 총회 총무 명의로 작성되었다. 그것은 1980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 시절 가장 어려웠던 것은 통계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각 노회 서기는 주판에 익숙하지 못한 목사들이었기 때문에, 대충 집계해서 보낸 통계표를 재작성하는 일은 매우 큰 집중력과 세심함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전국 노회의 재정 통계, 교세 통계를 낼 때면 거의 몇 백만 단위로 주판을 놓아야 했다. 문제는 한창 일을 하는 중에 손님이 오시는 경우였다. 사무실에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 목사, 장로들인데다가 나는 젊은 사람이었으니 앉아서 인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판을 놓다가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면 주판을 새로 놓아야 했는데, 그것이 제일 큰 고역이었다. 또 종로2가 기독교서회 빌딩 2층에 자리 잡은 총회 사무실에서는 외부의 전차, 버스, 자동차 경적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시끄러워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판으로 통계표를 작성해야 했으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문을 보내도 회답이 전혀 없을 때였고, 행정체계도 서 있지 않고, 지교회나 노회 사무실에는 직원이 거의 없어서 많은 일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상 일을 끝마친 뒤에야 집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출근은 아침 9시였지만,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가 않았다. 결국 나는 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은 결과였다. 1년간 병원을 다니며 약을 복용하여 완쾌는 되었지만, 그 후로도 나의 고됨은 끝이 없었다. 그때 사진을 보면 당시 내 고충을 말해 주듯 몰골이 말이 아니다.

여러 실질적인 어려움들이 많았지만, 총회 간사로 재임한 8년 동안 총회 보고서와 총회 회의록 작성 및 출판을 통해 예장 총회의 현황을 이해할 수 있었고, 교권과 지방색이 주는 피해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또 총회 소속 노회와 지교회 실정, 그리고 한국교회를 폭넓게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끝마치지 못한 유학 생활

총회 간사로서의 시간을 마치고 내게는 또 한 번의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다. 공부와 목사 임직에 대한 열망과 미련이 항상 남아있던 내게 미국 유학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미국에 있는 네 개 신학교에 지원을 했는데, 그중 사우스캐롤라이나 듀 웨스트(E South Carolina Due West)에 위치한 100년 전통의 얼스킨 신학교(Theological Seminary)에서 입학허가가 났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재미있다.

내 입학지원서를 받은 얼스킨 신학교 학장(M.A. Allisen)은 당시 그 학교의 유일한 한국 학생이던 김인식 박사에게 혹시 나를 아는지 물었고, 김 박사는 ‘총회에 있는 사람이며, 참 좋은 사람’이 라고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영어시험을 치르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다. 후에 미국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은, 김인식 박사가 숭실대학교 재학 중이던 1962년에 미국 유학 정보를 찾다가 총회에 전화를 걸었고, 당시 총회 간사였던 내가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준 것이 그에게는 큰 고마움으로 남아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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