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사회선교 궁극적 지표,‘하나님의 의·사랑·평화’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사회선교지침서 제정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사회선교대회를 통해 얻은 중요한 열매 하나는 우리 총회의 ‘사회선교지침’을 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한국 교회가 교회의 대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선교지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선교대회 준비의 일환으로 1982년부터 ‘사회선교시침서’ 기초위원회(강성두 김기수, 김용복, 이삼열, 이의호, 정남교, 정복량, 정봉덕, 박창빈, 류태선)를 조직하여, 이를 준비하였다. 사회선교대회를 전후하여 김용복, 이삼열 등 초안소위원회 위원들의 각고의 노력을 거쳐, 마침내 1984년 9월 5일 제69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사회선교지침>이 채택, 제정되었다. 이 지침서는 말 그대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 모든 교회의 사회선교를 위한 지침으로서, 우리 교회가 대사회적 선교과제를 책임 있게 수행하는 데, 든든한 주춧돌이 되었다. 이 문서는 사회선교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사회선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하여 힘쓰는 노력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부분적으로나 단편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통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정치, 사회적 이상향의 건설이나 단순한 역사 변혁을 위한 활동과는 구별되며, 그 목적은 처음부터 역사 전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 전 인류에게 드러나게 하는 데에 있다.
이 지침서는 이러한 사회선교의 근거를, 성서적 기반과 한국교회사적 배경과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로부터 찾았다. 또 이 문서는 한국 교회 사회선교의 궁극적 지표를 메시아 왕국의 비전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평화’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러한 궁극적인 지표를 우리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용하여, 다음의 네 가지를 구체적인 ‘사회선교의 지표’로 제시하였다. 첫째, 민주발전과 참여의 증진, 둘째, 정의구현과 약한 자에 대한 관심, 셋째, 통일의 모색과 세계 평화에 기여, 넷째, 창조적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가 그것이다.
돌이켜 볼 때, 당시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숨도 쉬기 어려운 때였다. 바로 그러한 때에,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회선교의 지침으로서, 위와 같은 네 가지 지침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위 사회선교지침에는 당시 점점 대두되기 시작했던 환경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사회선교지침의 제정은 이후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사회선교정책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
총회연금재단
총회록에 의하면, 1957년 제42회 총회에서부터 은급부장의 보고가 이어졌으나 제57회 총회부터는 은급금 운용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보고가 되고, 다시 1986년 ‘연금위원회’로 개칭한 것을 알 수 있다. 두세 차례 제도의 보완에 따른 규정의 개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8년 내가 사회부 총무로 부임하여 8년간 은급금 운용위원회의 이름으로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사회부 규정을 개정할 때는 은급금 운용위원회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인 인가 후에 총회연금재단이 독립기구가 되었다.
1987년 1월 19일 사회부 실행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은급기금이 7억7천606만2천872원이다. 내가 1천여 만 원을 인계받아 관할한 10년간의 결과와 국민연금제도 시행을 앞두고 보다 발전적인 제도를 강구할 필요성이 감지되었다. 그러므로 여러 번의 논의 끝에 다른 사회단체와 함께 총회연금제단으로 개편하여 1989년 12월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러 가입자 1만3천500명, 기금 3천300억 원, 수급자 75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이 제단에 분쟁이 생겨 가입자와 비가입자 모두에게 아픔이 되고 있다. 총회연금재단은 더불어 살기 위한 결속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욕심내지 않고 주님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재단의 취지를 기억하며 난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급을 받지 못해 고통을 당하는 교역자들을 계속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런 어려운 때 총회의 어른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냐고 묻고 싶다.
그리고 내가 총회연금재단을 위해 진행한 아주 뜻깊은 일 중 하나는 기금 확보를 위해 (독)노회록과 총회록(1907~1942)의 영인본을 발행하여 근세 한국 발전에 기독교의 기여도를 입증하는 사료를 남긴 것이다.
한독아동복지회
청계천 일대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판자촌 주민들이 당국의 정책으로 인해 경기도 남양만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 그들과 같이하던 김진홍 목사(두레 공동체, 두레교회)도 함께 이주하여 그들을 돌보는 선교활동을 열심히 펼쳤다. 그 시기에 독정리, 장안1, 장안2, 원정리, 호암리, 이화리, 여섯 마을에 어린이집을 개설하게 되었고 한독아동복지회(KNH)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김진홍 목사가 그 지역을 떠난 후 한독아동복지회가 총회에 남양만의 6개 어린이집 운영을 책임져 달라는 요청을 해 왔고, 총회 임원회는 사회부에 그 책임을 위임하게 되어 1984년부터 3, 4년간 6개의 어린이집을 돌보게 되었다.
어린이집 운영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은, ‘어린이집 연합 운동회’를 개최한 일이다. 독정리교회 김종규 장로와 상의하여 원장 모임에서 이 문제를 토의했고, 6개 어린이집 대표로 준비팀을 구성하여 지역 주민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연합운동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986년 10월 3일 장안초등학교에서 열린 6개 어린이집이 함께한 운동회에는 300여 명이 모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역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연합 모임을 통해 지역사회가 화평 가운데 하나 되는 길을 모색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시도는 지금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아파트마다 들어선 여러 교회들이 연합운동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전도로 이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노회장 시상, 당회장 시상 등) 지역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교회는 지역과 사람들을, 또 사람들은 교회와 이웃을 이해하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장로교 복지재단
6.25전쟁이 1953년 휴전협정을 맺었다. 전국적인 복원 활동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던 이 시기에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총무인 유호준 목사는, 미국 북장로회 한국대표 에드워드 아담스(Edward Adams) 선교사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교역자를 도울 수 있는 8천 달러를 준비했다는 말을 들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