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헌혈에 대한 네팔 사람들의 인식도 그랬다. 나는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수술 가운을 벗어젖히고 혈액 검사실로 냅다 뛰어가 검사실 기사에게 팔뚝을 내밀었다.
“내 피 좀 맞춰봐요!”
신기하게도 할아버지의 혈액형은 포지티브 B(Positive B type)로 나와 같았다.
“꽉꽉 채워서 두 병 뽑아요!”
내가 젊었던 시절에 피를 담는 용기는 유리병이었다. 그래서 병의 용량 이상은 더 담지 못했고, 내 입에는 습관처럼 ‘피 몇 병’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비닐처럼 부드럽게 만든 플라스틱 혈액 용기가 유리병 대신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축성이 있다 보니 정량보다 더 많은 피를 담을 수도 있다. 그때 내 피를 담아내는 용기도 바로 새로운 플라스틱 컨테이너였다.
물론 정상적인 채혈량보다 많이 뽑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나는 플라스틱 컨테이너가 늘어나서 팽팽해질 때까지 피를 계속 뽑으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되면 한 병 분량은 훌쩍 넘기게 된다. 바로 수혈할 것이니 최대한 많이 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첫 번째 컨테이너에 피가 들어갈 만큼 들어갔는지 기사가 다른 컨테이너로 교체해 100cc 이상 뽑았을 때였다. 네팔인 원장이 뛰어와서 놀란 음성으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닥터 강!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수술하던 의사가 환자에게 헌혈을 한다기에 설마 했는데, 당장 중지하세요! 이러다 닥터 강이 죽습니다.”
원장이 서둘러 채혈을 중지시킨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나를 특별히 좋아하고 아꼈는데,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병원에 부임한 이후로 환자가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장의 기세에 눌린 기사가 채혈을 중지했다. 하지만 이미 한 병 반 이상 뽑아두었고, 추가로 뽑은 혈액까지 합하면 내가 계산한 두 병은 족히 될 것이었다. 보통 정한 분량 이상의 헌혈을 하면 안 되지만 그날 나는 거의 두 사람 분량의 헌혈을 했다. 상식적으로 무척 위험한 짓이었다. 헌혈자가 현기증을 느끼는 것은 물론 심하면 쇼크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피곤하지 않고 어지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기운이 펄펄 났다. 곧바로 할아버지 환자에게 내 피를 수혈했고 그는 목숨을 건졌다.
환자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염려했던 대로 복부에 염증이 계속 생겨 고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희한하게도 고름이 한 곳을 통해서만 새어 나왔다. 개복(開服)할 때 명치끝에서 복선까지 절개했는데, 만약 염증이 배 전체에 다시 퍼져서 고름집이 이곳저곳에서 터졌다면 재수술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한 곳에서만 고름이 나온다는 것은 염증이 점점 사라지고 회복이 되어간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환자의 손상된 장기가 완치될 때까지, 며칠 동안 내 손으로 직접 염증을 없애고 회복을 위한 처치를 했다. 그리고 꺼내놓았던 장기를 다시 밀어 넣는 수술까지 마무리하고, 할아버지는 완전히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수술부터 퇴원까지 한 달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정도면 회복 속도가 매우 빠른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완쾌하여 퇴원하던 날, 두 아들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나무 뿌리 같은 것이 잔뜩 들려 있었다. 네팔 사람들이 산에서 캐 먹는 길고 큰 뿌리인데, 고구마와 비슷한 것이다. 아버지를 살려준 것이 고마워서 내게 선물하려고 직접 산에서 캐왔다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과 정성이 느껴져 흐뭇한 마음으로 받았다. 이 일은 내 평생에 잊지 못할 사건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 2차로 네팔에 들어갔을 때, 현지인에게 넘어가 있던 병원을 다시 찾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나는 회진하기 전에 늘 짧지만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진료에 어려움 없게 해주시고, 잘 낫게 해달라고.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게 해달라고 간단히 기도하지만 주님 을 의지하며 진료하고 수술할 때마다 주님은 새 힘을 공급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