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내 목소리가 내 귀에만 들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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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유튜버들의 세상이 왔나 싶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유튜브를 열면 작은 네모 창들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저마다 굵게 찍힌 제목들이 클릭을 유혹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기관들이 이 21세기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영상과 메시지를 올리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최근 통계는 드디어 (저녁 7시 이후) 유튜브 접속자의 숫자가 지상파와 케이블 TV 시청자들을 다 합친 것보다 많아졌음을 알린다. 

올겨울 들어 주말에 눈이 내려 자동차전용도로가 결빙으로 위험하다고 집에 머물러 유튜브로 ‘온라인’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고, 여러가지 유용한 정보를 유튜브 채널들을 통해 얻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 대중매체의 역할이 필요충족을 넘어 공해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구분해 유익한 채널들이 유해한 것들에게 압도당하여 가짜뉴스, 미풍양속을 해치는 컨텐츠, 여론을 오도하는 편향된 주장들이 넘쳐난다. 

각종 사회관계망 즉 SNS를 통해 유포되는 다양한 정보들은 일단 개인적인 차원의 것들이라 유해성이 유튜브와는 구별된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사건에 관하여 A라는 사람이 친구 B에게 카톡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것을 통해 자신이 믿는 무슨 음모론을 전달해도 누가 상관할 바 아니겠으나 유튜브를 통해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이 사건의 배후에 어떠한 세력이 있다느니 떠들어 대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에 아무런 규제나 제재를 가할 수 없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때문이다. 그런데 그 헌법은 어찌해서 나의 영혼이 온갖 거짓과 사악한 소리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로이 살아갈 권리는 보호해 주지 않는가. 

교회 ‘삼일기도회’는 회중의 통성기도로 마무리하는 예가 많다. 인도하는 목사는 통성기도의 공통 제목을 제시하고는 성도들에게 ‘내 목소리가 내 귀에만 들리도록’ 소리 내어 기도하라고 일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누가 매우 큰 소리로 또 빠른 속도로 기도하면 방해를 받아 자신의 기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모든 사람이 다같이 목청을 다해 기도하면 속이 시원해진다고도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기도에 깊은 뜻을 담지 못한다. 역시 내 목소리가 내 귀에만 들리도록 하는게 좋다. 이런 것을 표현의 자유의 한계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성경의 사사시대에 사람들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를 맘껏 누렸을 그 때에 성경에 기록된 베냐민 사람들의 잔혹행위 말고도 수많은 무도한 일들이 모세율법에도 불구하고 벌어졌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로부터 왕조시대로 넘어갔고 세계 역사는 수천 년을 지나며 오늘의 자유민주사회에 도달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람들은 무제한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받게 되었으나 오늘의 현실은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보다 자유로부터의 제약, 바꿔 말해 자유에 의한 제약이 더 큰 문제로 되고 있음을 본다. 

주먹을 휘두를 자유는 다른 사람의 코 끝에서 멈춘다는 격언이 있다. 이대로 두면 유튜브의 난립으로 인한 폐해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때아닌 사사시대에 돌입하여 사람마다 더 큰 불편을 당하기 전에 사회적 합의로 합리적인 규제가 이루어지면 좋겠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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