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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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으로 평북지역 교회·교인 수 크게 성장

선천 읍내, 주일에 장날 겹치면 장 열지 않기도

전체 책임은 위대모 선교사가 맡았다. 위대모 선교사는 이 지역을 맡은 해에 3차례 순회했는데 다 마치기까지 5개월이 걸렸다. 그동안 그의 조사 양전백은 지방 교회들을 쉬지 않고 찾아다녔다. 양전백의 헌신으로 1898년부터 1899년까지 1년 사이에 평북지역의 교회 수는 12개에서 26개로, 교인 수는 53명에서 202명으로, 세례 지원자는 151명에서 363명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 전해에 세웠던 계획대로 권서 한 사람을 이 지역에 더 배치해 매우 유능한 조사 양전백과 함께 협력하게 했다. 이 두 일꾼이야말로 그 1년간 이룩한 놀라운 성과의 주역이었다. 양전백은 1898년 선천읍교회를 설립했고, 1901년부터 의료 선교사 샤록스(A. M. Sharocks)와 함께 선천에 상주했다. 1902년 조직교회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양전백을 장로로 세움으로 교회가 활기차게 변했다.

양전백은 1900년 교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소학교인 명신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일하다, 1905년 교우들과 함께 남자 중등 교육 기관인 신성학교를 설립했다. 그 이듬해 의주읍교회는 장유관의 발의로 동지학회(同志學會)를 조직하고 읍내 소학교를 확장해 남녀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해 학교 이름을 양실학원(養實學院)이라 했다.

1902년 장로가 되면서 선천뿐 아니라 평북지역 교회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된 양전백은 청일·러일전쟁을 겪으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교육을 통해 이를 구현하려 했다. 우선 선천읍 교인들의 자녀를 중심으로 교회 안에 학교를 세웠다. 이미 1900년 초등 교육 사숙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후에 명신 학교가 됐다. 

1904년  양전백이 신학교 2학년이었을 때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와중에서 주요 싸움터였던 평안북도 일대의 교회들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막사 또는 병원으로 징발되었고, 시설이 파괴되거나 불에 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러일전쟁의 처참한 경험은 평안북도 일대 교회들을 사실상 관장하던 양전백에게 약소민족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이를 계기로 불붙은 민족 의식은 그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을 아우르는 민족 구원의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했는데, 그 첫 결실이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의 설립이었다.        

1905년에 안준, 김병농, 김석창, 이창석, 노효욱, 노정관, 조규찬 등 선천읍 교인들과 협력해 중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이다. 이 학교는 방표원, 이기혁, 고병간, 김선량, 백낙준, 백일진, 이대위, 계병호, 박형룡, 장준하, 계훈제, 김산 등 많은 교계 및 정계 독립운동 지사들을 배출한, 정주의 오산과 함께 일제 시에 민족주의 세력을 양성한 민족 교육기관이었다.

양전백은 또 1907년 여성 교육기관으로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도 차경신, 김성무, 강기일 등 여성 민족운동가를 배출했다. 이 같은 민족 교육을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서북지역 민족 세력의 중심이 됐다. 양전백 목사는 1909년부터 선천읍교회 담임목사로 선천을 중심으로 한 서북의 민족 교회 세력을 주도했다.

1911년 교인이 급증하면서 선천 읍내를 가로지르는 장천(長川)을 경계로 기존의 선천읍교회를 북교회로 하여 남교회가 분리됐으며, 이후 북교회에서 중앙교회(1930)가, 남교회에서 동교회(1931)가 분립함으로 지교회들이 생겨났다. 선천은 2만의 인구와 4천여 호의 소읍이었으나 주민의 60퍼센트 이상이 기독교인이어서, 주일에 장날이 겹치면 장이 서지 못할 정도였다. 또 네 교회(북·남·동·중앙교회)가 연합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공부가 끝나면 비공식 모임을 통해 교회 발전을 논의했으며, 교회 연합으로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운영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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