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만남의 인연은 하나님이 맺어 주신 것
내 인생의 멘토에는 김용복 박사도 있다. 총회 간사로 있을 때 당시 스물 한두 살이던 김용복 박사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어 총회장 추천서가 필요하다며 연세대학교 한태동 교수와 함께 총회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 후 수년이 지나 나는 사회부 총무로 재직하게 되었고, 귀국한 김 박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총회의 든든한 협력자가 되어 한국교회 100주년 사회선교대회를 비롯하여 중요한 선교활동을 시작할 때마다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한아봉사회’와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을 창립하기 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당시에는 그가 민중신학자이고 운동권이라고 해서 총회 사람들은 김 박사를 기피했었다. 비단 총회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국에서도 그를 급진적인 사람으로 여겨 감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람됨과 명민함을 신뢰했다.
도림교회 유의웅 원로 목사도 내게 여러 가지 본을 보인 분이다. 1974년 아버지 유병관 목사를 이어 도림교회 4대 목사로 부임한 그는 총회사회부가 지향하는 지역사회 주민의 삶과 문화의 질을 높이는 바람직한 교회상을 보여 주었다. 총회복지재단 이사장과 총회연금재단 이사장뿐만 아니라 사단법인 한아봉사회 이사장으로, 나와는 오랜 시간 현장 사역을 나누었다. 그리고 은퇴한 후에도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의 소액신용대출사업을 적극 후원하고 있다.
이만영 장로는 1978년 11월 4일부터 1999년 3월 25일까지 재단 감사, 안양원로원 원장과 제6대 이사장으로 봉직하면서 누구보다 물심양면으로 재단 발전에 기여하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들어 쓰시려고 보내신 내 인생의 멘토들 중에서도 특히 박종삼 목사, 이삼열 박사, 김용복 박사는 내게 싱크탱크(think tank)와도 같은 존재였다. 나는 종종, ‘내가 신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이라면 좀 더 튼튼하고 바른 사회선교 기초를 닦아 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역 현장 어디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내가 신학과 사회선교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게 하셨다. 지난 세월, 내가 계획하고 진행한 모든 일들은 모두가 함께한 일이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만남이 스치듯 시작된다. 추천서 작성을 도와주고, 문의 전화가 왔을 때 친절히 대답해 준,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행동들이 일생을 통해 동아줄처럼 굵고 질긴 인연으로 묶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또, 앞으로의 그런 작은 만남들이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순간순간의 만남이 참 소중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 모든 인연은 하나님이 맺어 주신 것이리라.
남은 이들 앞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사회선교대회에서의 개회예배를 기억한다. ‘신앙공동체에서 생활공동체로’라는 소제목으로 제62회 총회장이신 임택진 목사가 설교를 했다. 임 목사는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아름다운 얼굴과 못난 얼굴이라는 서로 상반된 이미지로 표현했다. 1980년대 교회지도자들이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러했다.
분명 한국교회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자세로 한국을 새롭게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일제의 탄압 밑에서 자주 독립을 위해 투쟁했으며,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이후 3.15 부정선거와 5.16 쿠데타 등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혼란에 빠진 나라에서 고통 받던 국민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나라 안팎으로 어두웠던 시절,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그러는 동안 교회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공신력은 저하되었다.
나는 한국교회의 급성장기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여러 부서에서 근무하고 은퇴한 사람이다. 여러 면면을 보며 느낀 것은 한국교회가 교회의 자립과 성장에 급급하여 교인을 바르게, 교회를 교회되게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것이다.
세상을 섬기는 교회
시대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많은 것들이 ‘시대가 변해서’ 라는 이유 앞에 할 말을 잃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아야 할,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교회의 사명이다.
내가 1955, 1956년도에 전국 교회를 순회할 당시만 해도 교회건물을 ‘예배당’이라고 표기한 곳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예배당이라고 표기한 교회는 거의 볼 수 없다. 예배당과 교회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부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