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학대학원 시절 충신교회에서 아동부와 청년 대학부 교육전도사로 섬기고 있었다. 전임 전도사, 부목사 생활도 해본 적이 없건만 신대원 졸업과 동시에 망원제일교회 담임으로 부임을 했다. 평생 참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기며 살아왔지만 내 젊음을 불태우며 생명 아까운 줄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 이곳 처녀 목회지였다. 나는 이곳에서 목회의 행복도 알게 되었고 교회 부흥도 맛보았다.
내가 충신교회를 떠나던 날 박종순 목사님께 이임 인사를 드렸더니 목사님께서 두 가지 말씀을 주셨다. 첫째는 처녀 목회지이니 말씀대로, 배운 대로 목회를 하고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멋지게 해보라는 말씀이었다. 둘째는 불혹의 나이가 되기 전에 그곳이든 다른 길이든 평생 섬길 목회지 사명의 땅을 찾으라는 말씀이었다. 분초를 쪼개며 목회에 미쳐 살다보니 내 나이 사십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어, 불혹의 나이가 되고 있네! 그래서 결단한 것이 맨손, 맨몸, 맨땅 3맨 개척의 길이었다.
사랑으로 섬기던 교회를 떠나는 것도 힘이 들었고 아무런 도움도 준비도 없이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보라 몰아치는 그 해 추운 겨울 맨손으로 예배 처소를 찾아 헤매는 일은 참 외롭고도 고달프기만 했다. 권사님의 학원도, 장로님의 공장도, 집사님의 유치원 한 켠도 우리의 예배 처소로 준비된 곳은 없었다. 나는 금식하며 광야 빈 들도 좋으니 돗자리 한 자락 깔고 성경 올려놓을 보면대 하나만 있으면 족하니 예배 처소를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었다.
이 일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었던지 머리에 온통 붉은 반점이 솟구치고 있었다. 마치 욥처럼 가려운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기도를 했다. 아내가 시장에 간다고 대문을 나섰다. 골목을 나서는 아내를 향하여 이층 난간에서 큰 소리로 아내를 불러 세웠다. “여보, 여보!”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올 때 소주 한 병 사와!” 누가 머리 가려운 발진에는 소주로 머리를 감으면 좋다고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큰 소리를 앞집에 살던 구 집사님 내외가 듣고 큰 시험이 들었다고 한다. 마냥 좋아하고 존경하던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더니 저토록 쉽게 타락을 했구나 싶었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 사연을 알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이 소주 넌센스 사건은 그 이후에도 또 한 번 있었다. 황수관 박사가 생선회를 먹고 패혈증에 걸려 그 아까운 분이 별세를 한 무렵이었다. 목사님들 사이에 소주를 마시며 생선회를 먹으면 패혈증에 걸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배운 대로 생선회를 먹을 때는 생선회 접시 위에 소주를 한 병 부어 흘러내리게 한 다음 회를 먹고 하던 시간이 있었다. 마침 친구 목사님들과 함께 빈 소주 병을 옆에 두고 회를 먹고 있었다. 평소 소주를 즐겨 마시던 우리 교회 집사님이 목사님 곁에 놓인 소주병을 보고 큰 위로받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웃지 못할 넌센스 소주병 사건이 되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자기 혼자만의 생각과 판단으로 시험에 들지 말지어다. 또한 나의 생각 없는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도 누군가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으니 시험에 들게 하지도 말지어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