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③
김활란 박사 ‘전도 할머니’ 면모 발휘
백절불굴 전진, 김 박사 신앙 생활 발로
정인상 목사, 1인5역 방대한 일 감당
복음 전사자들 한결 염원 ‘복음 전파’
1만 명이 넘는 교우와 수없이 많은 부속 기관의 모든 일을 통솔하면서도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지방순회하면서 연합집회를 인도하시는 한편, 중요한 대회의 설교는 전부 도맡아야 했던 한경직 박사의 활약은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정도의 예외의 일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총무일까지 겸해 직접 이 일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김활란 박사는 ‘전도 할머니’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발휘했는데, 그를 아끼는 측근자들은 그의 건강을 크게 우려할 정도로 침식을 잊고 전력을 기울였다. 모든 일의 계획, 운영, 재정 조달은 물론 10여 명의 실무자를 손발같이 움직여서 목표를 향해 백절불굴하는 전진을 과시한 것은 오로지 김 박사의 평소 신앙 생활의 결정적인 발로였다고 믿는다.
그밖에도 조세광 박사의 통역으로 전국을 순회한 강신명 목사, 조직과 운영에 심혈을 기울여준 조동진, 명신익, 김형도 목사, 실행위원회의 중축을 이뤄 운영해준 조광원 신부, 안길화 부령, 길진경 총무, 유호준 총무, 한영선 총무, 김옥길 총장, 강의와 통역과 문서로써 매일같이 동원된 지원용, 이권찬, 윤창덕, 김준곤 목사 등은 모두 이상의 실무를 담당하신 분들이며, 지구위원회의 책임을 지고 동분서주하신 이기혁, 최중해, 박용익 목사님의 수고와, 재정 연출과 신문 전도에 무임실무위원의 역할을 한 채기은, 정석복, 성갑식 제씨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쓰기 시작하면 정말 그 초대교회 같던 분위기 속에서 수십 번씩 지방으로 향해 자비로 출장을 내려가던 목사님들과 자기들의 일을 전부 제쳐놓고 글을 써 주고 돈을 내주고 하던 1965년의 성자들의 이름은 지면이 모자라서 다 기록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실무자의 뒷자리에 앉아 바라보던 한 알 밀알의 땀으로 목욕하던 모습은 몇 마디로 엮어 놓은 것이 다음에 올 일을 위해 좋을 듯해 그 이름이라도 남기고 싶다.
이 운동의 시초가 NCC 전도국에서 싹트기 시작했던 만큼 간사였던 김덕수 목사의 조직 당시의 노고는 컸던 것이다. 아직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기 전인 1964년 10월부터 준비위원회 구성과 중앙위원회 조직, 그리고 제1차 수련회를 거쳐 모든 문서와 사무가 체계화될 때까지 상부층에서 의결되는 것은 모두 김 목사의 사무 역량을 통해 구체화되는 수밖에 없었다.
김 목사는 금성장로교회의 박학래 목사를 불러 협력을 구했다. 박 목사와 김 목사는 계획에서 연락, 회의, 인쇄, 발송에 이르기까지 1964년도 저물어가는 엄동에 땀을 흘리며 동분서주해 그 방대한 조직 체계의 사무적인 제품을 생산해 놓았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각 분과별로 일을 시작해야 하므로 성결교회의 정인상 목사가 발탁되어 학원, 군중, 특수 전도와 사회단체 전도까지 1인 5역의 방대한 일을 맡아 새벽부터 출근하기 시작했다. 실로 정 목사는 가장 먼 거리에서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많은 위원회를 가장 침착하게 운영하다가 가장 늦게 퇴근하는 실무자로서 일관했다.
그 후 조직을 담당하기 위해 김형도 목사가 실무자로 동원됐다. 김 목사는 전직 육군 군종감으로서 일찍이 청년운동과 체육에는 전문가의 경지를 넘고 단체 조직의 묘안 운영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으로서 전국 41개 지구가 그의 활동으로 조속한 시일내에 조직됐으며, 전국 순회 전도의 릴레이식 강사 배정을 하루밤 사이에 짜서 내놓아 틀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늘 명랑한 성격으로 좁은 사무실의 질식할 정도의 미적지근한 공기를 웃음으로 씻어주는 시원한 봉사를 아끼지 않은 분이다.
이 무렵 연세대 재학때부터 <연세춘추>를 편집한 바 있는 김효성 선생이 실무자로 봉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문서전도 분야는 전진하기 시작했으며, 매월 1회씩 내놓은 월간지 <1965년 복음화 운동>은 그의 비상한 솜씨가 아니면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아담한 것이었다. 시간은 촉박하고 사무량은 늘어가고 돈은 계속 필요했다. 1년 동안의 운동이어서 모든 면에서 제약을 받으면서도 있을 것은 다 있어야 하고 쓸 것은 다 써야만 했다.
이 살림의 돈주머니를 꼭 잡아 쥐고 연보를 연보돈답게 써준 분이 이정희 선생이다. 이 선생은 여성회관의 중책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 박사님의 말씀 한 마디에 선뜻 협력하길 시작해 900만 원 이상의 적지않은 예산 집행에 감사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정확하게 회계해 냈던 것이다. 그는 감사에게만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을 받을 분이다.
그 후 황광은, 이병설, 김영환 목사가 각각 부총무, 서무 간사, 농어촌 실무위원으로 같이 일하기 시작했는데, 황 목사가 사무 연락과 재정부를 담당하고-이병설 목사는 다년간의 감리교 연회 회계와 경험을 살려 전체 서무를 담당하는 한편 모든 자료의 수집과 지방 집회의 연락을 담당하고, 필요하면 지방까지 출장해 전국 조직의 사무적인 유대를 꾀했으며, 김영환 목사는 농어촌 분과위원회 위원장이요 중앙위원회 실행위원이면서 또한 실무를 맡아 그가 일생을 몸바쳐 일하는 농촌의 복음화를 위해 최대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니 아마 1965년은 그의 최고의 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 이들보다는 열거하지 못하는 분들의 숨은 수고를 잊을 수가 없으니, 그는 곧 전문서(8천 교회에 보냄) 타이핑하느라고 밤을 새우던 타자수 문선희 양, 한 달에도 두 세 번씩 실어내어야 하는 8천여 통의 짐짝을 남자처럼 등에 지고 나르다가 눈물 흘리며 심부름한 김순자 학생, 각각 기관에서 보내와서 명실공히 봉사를 해준 남경순 장로, 조성헌 선생, 홍군기 선생, 또 홍보희, 강정희, 김영숙, 이효원 양 등등 실로 서울 중앙YMCA 빌딩 302호실은 오순절 다락방이요, 120명 군산의 재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역사를 재연했던 것으로 본다.
실로 실무자란 명예스러운 봉사의 뒤곁에 끼니를 굶는 가족을 근심해야 하는 분도 있었고, 시무하는 교회에서 기피받는 어려움을 당한 분도 있으며, 저금통장을 털어가며 실무자 노릇을 한 분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되리라고 믿는 복음의 전사자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었기에 기쁘게 희생한 일들이며, 실무위원에 정비례해 더 많이 희생한 위원과 감사들과 일반 교계 유지에 비하면 오히려 갚고도 남을 영광스러운 빚인줄 알아 감사하는 것이 실무자들이었던 것을 외람되이 대언해 둔다.
끝으로, 이 운동이 끝난 후에도 6개월을 하루같이 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심혈을 경주해 준 능력있는 젊은 조성헌 선생의 수고를 특기해 둬야 하겠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