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자상한 아버지, 인자한 거장 ③
식사기도서 어려운 사람 돕길 기도
받는 자보다 주는 자 행복 누리려 노력
어린이들에 다정한 친구·친절한 스승
아이 입장에서 이해심 깊게 배려
문제 부모 있어도 문제아 없다는 철학
아아, 고단합니다. 인생의 차장 노릇도 못해 먹겠습니다. 나도 좀 쉬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안녕히 가십시오. 본 차장은 침대차에 누워 있겠습니다. 괴로운 길 가다 어려운 일 생기면, 무거운 짐진 사람은 다 침대차로 오십시오. 내가 편히 쉬게 해드리지요.
괴로운 인생길 가는 동안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이렇게 찬송가로 끝내곤 했다.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
김 여사는 식생활 얘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집 식탁에는 언제나 보리밥과 반찬은 두 가지 이상일 때가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보리밥을 못했을 때 황 목사는 마치 어린애처럼 밥을 안 먹는다고 투정을 한다.
“반찬이 너무 없어서 어떻게 하나요?”
무심결에라도 아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큰 야단이 난다.
“아니, 왜 반찬이 없다는 거요. 하나, 둘, 셋….”
하면서 간장까지 세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피란 시절 제주도에서, 아니 그보다도 해방 이전에 소금 찍어서 보리밥을 먹던 고아원에서의 생활을 잊지 못해 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식구가 식탁에 앉아 기도할 때면 다음과 같은 말이 빠지지 않았다.
“우리처럼 먹지 못하는 사람을 보살펴 주십시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교인 집에서 혹 잔치라도 있어 갔다 오는 날이면 황 목사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그렇게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야만 하우? 좀 검소하게 차리라고 일러줄 수 없소?”
크리스마스 때가 되어 선물이라도 들어오게 되면, 황 목사는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섭섭함을 느꼈던 것 같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그 행복을 잃은 것 같아서 서운해하곤 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받는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하나?”
그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으레 지난날 고아원에서 지낼 때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그것을 구하느라고 동분서주하던 때를 그리워하듯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는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오면 기독교 학교나 교회 학생을 통해서 고아원에 양말 보내기 운동을 펴곤 했었다.
“얘들아, 우리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되어 볼까?”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축하 순서를 끝내고 돌아온 늦은 밤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곤 했다. 그리고 창신동 뒷골목 판자촌을 즐겨 찾았다. 꼬마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집을 골라서 선물을 한 뭉치씩 전하고 돌아서는 아버지 황 목사와 네 아이들은 마냥 기쁘고 즐거워했었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있어선 언제나 다정한 친구요, 친절한 스승이요, 부드럽고 이해심 깊은 아버지였다. 아이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소리질러 야단치는 법이 없었고, 아이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이 아이에게보다는 부모에게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었다.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이에 대한 그의 철학이었다.
“여보,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추억을 많이 남겨 주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오!”
이러한 생각이 늘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바쁜 시간 중에도 잠깐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기를 가장 즐거워했다.
목사 생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주말이라고 즐거워하는 토요일과 주일이 가장 부담스럽고 긴장된 시간인 것이다. 그는 주일 저녁 예배가 끝난 밤 아홉시 이후가 가장 홀가분하고 기분 좋은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시간을 택해서 그는 곧잘 산책을 즐겼고 남산 드라이브를 즐기곤 했다.
“여보, 이런 기회가 늘 있는 것이 아니오. 자, 어서 나갑시다.”
황 목사는 자녀 교육이란, 말이 아니라 부모가 어떻게 살았느냐가 바로 교육이라고 했다. 부모의 신앙과 생활을 아이들이 보고 있으므로 이중 인격이나 이중성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할 때 아이들은 신앙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
목사는 바로 나지 아이들이 목사는 아니니까 그들을 향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 여사가 아이들의 교육과 장래를 염려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당신의 힘으로 아이들을 기른다고 생각하지 말우. 아이는 하나님께서 길러 주시는 것이지 당신이 기르는 것이 아니오.”
동화 ‘돌아온 해피’
황 목사는 옛날 이야기를 잘 썼고 또 잘 했다. 사실 그는 동화나라 같은 어린이 세계에서 늘 순진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동화를 만들면 우선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재미있어하고 흥미로워하는지가 큰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동화의 소재는 대개 아이들의 세계에서 찾아내곤 했다.
‘돌아온 해피’라는 동화가 있다. 그 작품은 그가 안암동에서 살 때 아이들이 무척 사랑했던 강아지를 소재로 한 것이다. 물론 해피는 강아지 이름이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김 여사는 아이들의 간청에 견디지 못해서 강아지를 얻어다 마루에서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해피가 행방불명이 되고만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해피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혹시 어린 해피가 얼어 죽지는 않았는가 해서 애를 태웠다. 그런 어느 날, 밤이 깊어지려고 하는 고요한 밤에 마루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바로 해피의 울음소리가 아닌가! 마루를 뜯어내고 해피를 꺼냈다. 황 목사는 이것을 소재로 해서 ‘돌아온 해피’를 썼다.
그런 황 목사는 자기 아이들뿐에게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에게도 재미있는 동화를 이따금 들려주곤 했었다.
안암동 3가 130번지 영암교회 사택은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세 번째 집이었는데, 그 좁은 골목에는 언제나 동네 꼬마들이 와글와글 뛰어놀고 있었다. 그는 그 꼬마들한테 언제나 빚진 사람처럼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