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가서 2장 14절)
지난 해, 성경을 통독하다가 알았다.
우리 주님께서도 자주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우리가 어떤 얼굴인가 아시면서,
우리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다 아시면서, 그분은 굳이 우리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신다.
또 말씀하신다.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우리가 지금 어떤 소리를 내는지, 어떤 신음을 토해내는지 다 아시면서,
그래도 우리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신다.
저도 들었다. “너는 어떠니?”
말씀을 읽고 난 다음, 주님은 제 얼굴을 보고 싶어하셨다.
어느 땐, 붉어진 얼굴. 부끄러움 때문에 붉어진 얼굴.
제가 말씀을 보았지만, 말씀도 나를 보고 있어서,
공교롭게 당시 내가 품었던 생각을 말씀 앞에서 들키곤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지었던 죄들을 보게 하셨는데.
주님은 그때마다 제 붉어진 얼굴을 보기를 원하셨다.
어느 땐, 환한 얼굴. 구원의 감격 때문에 환한 얼굴.
이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했구나, 내가 구원받았구나.
심지어는 구약 곳곳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고뇌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새로 깨달았을 때,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감동하고 있는 제 얼굴을 보려고 하셨다.
어느 땐, 안도한 얼굴, 위로와 격려 때문에.
그래, 이 말씀이다. 오늘 내가 붙들어야 할 말씀이 이 말씀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 말씀을 되뇌이며,
안도하고 있는, 다시 일어서는 제 얼굴을 보고 싶어 하셨다.
또 제 소리를 듣고 싶어하셨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일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소리부터 시작해,
“주님, 대체 무슨 뜻이예요? 저 모르겠어요” 하는 푸념까지.
말씀을 읽은 다음, 제가 낸 소리들을 주님께서 듣고 계셨으니,
말씀을 묵상한 걸 성도들과 나누려고 준비한 설교조차,
우리 주님께서 최초의 회중이 되셔서 먼저 듣고 계셨던 거다.
그건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반응을, 우리의 얼굴을, 우리의 소리를 우리 주님께서 듣고 싶어 하셨다.
왜? 우리가 그분에게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에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하고 불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다.
그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체로 대하시며,
우리의 얼굴을 보시고,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데.
이 사랑이 신비 중에 신비다.
다시 알았다. 말씀을 통해 이 사랑을 다시 알았다.
강영롱 목사
<삼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