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서울거리 고교생 1950년대 시가행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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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는 1953년 7월 23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6.25의 비참한 전쟁의식이 국민들 가슴에 남아 있을 때였다. 고교생들에게 교련 학습을 통하여 반공교육을 강화했다. 대나무 총을 어깨에 메고 전투교육을 받던 그 시절의 서울은 건물의 기관총 자국이 전쟁흔적이 보여주었다. 당시 200개 넘는 남녀 고교 학생들은 서울운동장에서 3.1절, 광복절 경축행사에 참여했다. 이때 초대 우남 이승만(1875-1965) 대통령 2대 국회의장 해공 신익희(1894-1956) 선생을 중심으로 일부 정부요인들이 마련된 운동장 본부석 자리에 앉아 꿈푸른 고교생들을 바라보았다. 

서울운동장을 가득 메운 남녀 꿈나무 학생들에게 신익희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우리 대한민국을 빛내자고 짧은 축사 말씀도 하셨다. 경축행사가 끝나면 남녀 고교생들이 자기 모교 교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학교이름 가나다순에 따라 종로 을지로로 나누어 보무당당하게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남자고교는 강문고교가 어깨 밴드를 두르고 각반을 한 기수단이 앞장 서서 씩씩하게 전찻길이 깔린 종로 길로 다른 고교생들이 을지로 길로 시가 행진을 보기 좋게 했다. 당시 서울시내 5대 사립 명문고교는 배재, 양정, 중앙, 휘문, 보성고교였다. 대광고, 동성고, 한성고, 강문고, 대신고, 마포고교 등도 대학진학률이 좋은 고교였다. 5대 공립고교는 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고였다. 당시 경기고교 조재호 교장 선생님과 서울고교 김원규 교장 선생님(서울시교육감 역임) 경복고교 맹주천 교장 선생님(맹형규 전 행정부 장관 조부) 세 교장 선생님은 장안에 잘 알려진 교장 선생님이었다. 5대공립은 아니어도 삼성 이건희 회장 모교 사대부고도 수재라야 입학되는 명문이었다. 성동고교도 진학률이 좋은 공립학교였다.

여자사립 고교는 이화, 숙명, 진명, 배화, 정신고교 공립 고교는 경기, 수도, 창덕, 무학 등이 알려진 고교였다. 덕성, 계성, 한성, 명성 등의 여고는 극성여고로 불렀다. 50년대 고교 졸업세대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동국대 중앙대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 진학도 잘 했다. 이 세대는 3.15 부정선거 규탄한 4.19세대, 5.16 군사정변을 겪은 세대로 나라 곳곳 큰 일꾼으로 나라 발전에 큰 빛을 남긴 세대이다. 이 1950년 시가행진은 지금 헐어 없어진 중앙청앞 광화문 광장에서 해산하고 자기 학교로 돌아갔다. 1950년대는 고교 수준이 차이가 있었으나 1968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의 교육평준화정책으로 전국고교가 평준화 되었다. 1950년대의 명문고교 이름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강문이 용문으로 고계가 장춘으로 교명이 바뀐 학교도 있다. 1950년대 종로 을지로의 고교생 시가행진도 1960년 들어 교통이 혼잡하여 사라졌다. 서울 운동장에서 축구 야구 농구 럭비 빙구 경기 시합을 벌인 연고전은 연세대 고려대가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 문제고 두 대학의 친목 위주로 연고전(고연전) 마친 뒤에 두 대학 학생들이 자기네 대학이 이겼다고 외치며 종로 을지로 거리를 뛰었다. 1930년대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높이기 위해 서울에서 연보전(연희전문 보성전문 현고려대) 두 대학의 경기가 벌어졌다. 그 경기를 중앙방송국에서 중계방송도 해 주었다. 서울 시내 고교 졸업생들이 연고대로 진학하여 1학년 때 경기 시합을 보며 선배들과 함께 목터져라 소리 소리 질러 연고전 양교 승리를 자랑스럽게 서로 외치는 응원전도 벌였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때 당시 경무대를 줄 서서 봄맞이 즐기던 추억이 떠오른다. 50년대 고교, 대학생들이 그 때의 기백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튼튼히 세워 주길 바란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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