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미학] 믿어지지 않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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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방원 얘기가 적어도 500년은 족히 넘은 옛날 일이 아닌가?”

연속극 ‘용의 눈물’을 보고 난 순모가 회전의자를 돌리면서 병우에게 물었다.

“그럴 거야. 우리가 소학교 다닐 때 이조 500년이라 했었으니까.”

병우도 의자를 돌렸다.

“그러니 2500년대쯤 가면 우리의 후손들이 사극에서 나오는 박정희 대통령을 보고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말할 게 아니겠어?”

순모와 병우는 같은 대학의 교수다. 그러나 과목이 순모는 화학인데 병우는 법학분야를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드물게도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는 전공과목만 달랐을 뿐 줄곧 함께 공부를 한 친한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자처럼 잘 어울려 다니면서도 생각이 달라 주장은 잘 맞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종교였다.

“우리는 오늘을 가리켜서 최첨단 과학시대니 컴퓨터세상이니 떠들지만 500년 후에는 우리도 미개시대라는 역사의 과정 속으로 파묻혀 버리고 말거야. 이건 결코 새삼스러울 것도 놀랄 것도 아니지.”

병우는 건성으로 머리만 끄덕였을 뿐 눈은 교과서에서 떼지를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언제 새삼스럽다고 말했었느냐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교과서 수정작업을 한답시고 별장까지 와서 기껏 한다는 게 또 논쟁이냐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순모쪽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그래서 사실 이상으로 과장을 하거나 또는 모르는 것을 겸손이라는 미명하에 아는 것처럼 둔갑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병우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늘상 말하는 것이지만 넌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을 혼돈하고 있어! 너야말로 과학만능에 사로잡혀서 그러는데…” “내가 신앙과 지식을 혼돈하고 있다니!” “내 말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솔직하게 시인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너야말로 솔직하게 말하라구. 어떻게 겸손이 아는 것이라는 뜻이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 안다고 하지를 않아.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안다는 게 무슨 뜻인데?”

“알았어!”

갑자기 순모가 일어서면서 병우의 말을 낚아챘다.

“알았다구. 고대 지구평면설이 구형설로 바뀌고 천동설이 지동설로 변해 왔는데 과학이 무엇으로 확실하다는 것이냐 그 말이지?”

“그러니까 모르고 있으면서도 아는 체 하고 있는 쪽은 과학자들이야. 왜 모르는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시인하려 들지 않고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느냐 그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모르는 건 모른다고 시인해야 한다는 거지.” “모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뜻이 아니야.”

순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이었다.

“믿음은 지식의 영역이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어.”

순모는 히죽 웃어 보였다. 말에는 이과가 문과에 당할 수가 없다는 마음에서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병우는 수화기를 들고 몇 마디 주고 받다가 순모에게 넘겼다.

“뭐라고? 돌아가셨다구? 아니 그럴 수가! 괜찮으시다고 그러시더니… 알았어!” “무슨 일이야 누가 돌아가셨다구?” “아주 좋아지셨다고 엊그제 본인이 직접 나에게 말씀을 하셨었는데 그 작은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거야. 좀 전에…”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바라만 보았다. 창문 밖에서 눈보라 소리가 미친 여인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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