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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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자상한 아버지, 인자한 거장 ④

아무리 피곤해도 아이들 청 들어줘

병상에서도 늘 명랑·인자·다정해

아픈 티 없이 문병객 웃음으로 맞아

기독교 아동복지회 계획에 정성 들여

황 목사가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그 좁쌀친구들의 떠들썩한 목소리로 그가 돌아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 안녕! 안녕!”

꼬마들의 반기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동화를 얻어 듣기 위해서였다.

“목사님, 옛날 이야기를 해 주셔요. 네? 딱 하나만 들려 주셔요!”

그러면 황 목사는 그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 그래, 해 줄께.”

아이들에게 에워싸이면 그는 아무리 피곤해도 거절하지 않고, 양복 저고리를 마루에 던져 놓고는 대문 문턱에 걸터 앉곤 했다. 그러면 꼬마들은 병아리처럼 모여 앉아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 무렵 황 목사의 뒷집에 숙원이라는 여섯 살짜리 남자 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종로에 직장을 가지고 계셨는데, 늘 밤늦게야 귀가하곤 했다. 그러니 숙원이가 자기 아버지를 기다릴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 하루는 숙원이 어머니가 김 여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모님, 우리 아인 참 우스워 죽겠어요. 글쎄, 자기 아버지는 기다리지 않고, 목사님이 언제 돌아오시느냐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뛰어 들어와서 묻곤 하지 않겠어요!”

백조의 노래 ‘까치’

1969년 10월, 공무로 일본 여행을 바쁘게 끝마치고 귀국한 황광은 목사는 그 다음 날부터 예원중고등학교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1주일간에 걸친 집회가 끝난 뒤 과로로 몸조차 가눌 수 없었던 그는 끝내 지병이던 심장기능 장애를 일으켜 입원하게 되었다. 이미 말한 대로 황 목사는 어려서부터 심장 판막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피곤을 더 느꼈고, 과로해서는 안 될 체질이었다. 그런데 과로를 한 것이다.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새문안교회 부목사로 있던 11년 전에도 한 번 과로 끝에 심장 기능 장애를 일으켜 쓰러졌던 일이 있었고, 그때 그는 이미 무서운 경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그는 기적적으로 완쾌되어 일어났고, 그로부터 10년 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했었다.

황 목사가 목회를 잘 한 탓도 있겠으나 어쨌든 영암교회는 그에 대해서 무척 너그러웠다. 때문에 그는 전국복음화 운동이나 전국기독교교육대회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자니 결국 그의 활동하는 템포만 자꾸 빨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끝내 자리에 눕게 된 것이다. 그 후 10개월 동안 병상에 있으면서도 늘 명랑하고 인자하고 다정스러웠기 때문에 부인이나 아이들은 간호하기에 괴로움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행복감마저 느끼는 착각을 일으켰다는 것이 식구들의 고백이다. 때문에 막내아들 승국이는 글짓기에서 이렇게 적어 놓기도 했다.

— 요새 우리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서 집에 누워 있어요. 나는 어디가 아픈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아버지가 집에 계시니까 재미있고 먹을 것이 많아서 좋아요.

병상생활 10개월

그 무렵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김유선 여사에게 사회부장직을 맡아 일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김 여사는 황 목사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여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김 여사에게 한 번 해보라고 권하며, 해야 할 일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었다.

“당신이 왜 그렇게 열을 내는 거요?”

“과부가 될 훈련을 시키느라고 그러오.”

무심결에 나온 대답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는 평소에 죽음을 준비하고 사는 슬기가 있었으리라.

그는 생애에 김 여사의 어떤 실수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혹시 견해의 차이로 해서 황 목사가 하는 일을 김 여사가 간섭하는 일이 있을 때, 특히 그 일이 남을 위한 봉사 생활일 때면 그는 자기 생명을 죽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황 목사는 조용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타이르곤 했다.

“예수님의 생애도 이 세상에서는 실패였는데, 예수를 따르는 내가 어찌 성공을 바라겠소. 우리 그저 그렇게 삽시다. 그것이 얼마나 좋소.”

병상에 10개월간 누워서 그는 곧잘 이런 말을 했다.

“목사가 끝을 잘 맺어야 하는데, 이렇게 오래 앓으면 안 되는데… 나는 지금 여러 가지로 정리하는 중에 있어요.”

김 여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이야기는 황 목사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에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 세 차례나 입원했다 퇴원했다 하면서도, 가족에게뿐 아니라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명랑하게 대하곤 했다. 면회를 안 한다, 전화를 안 받는다 등등의 소문을 들은 친구와 친지들이 대단한 줄 알고 달려 오면, 그는 그 특유한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그들을 대하곤 했다.

문병객들은 “괜히 누워 있는 것 아니야? 대단한 줄 알았더니 괜찮구만” 하고 안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어찌 아프지 않고 대단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티 하나 내지 않고 괴로움을 이겨 내면서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그가 간 뒤에야 사람들은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병상에서의 설계도

그는 병상에 누워서도 쉬지 않고 일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었다. 교회에 대한 새로운 설계도 해보고, 그의 생을 마지막 장식하고 싶었던 기독교 아동복지회에 대한 계획도 정성스럽게 작성해 갔다. 그 무렵에 황 목사는 김유선 여사에게 밤새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영암교회는 지대가 너무 협소하지. 신일학교 근방으로 교회를 이전했으면 좋을 것 같애. 그럴 경우에는 교회 버스를 운영하여 안암동 쪽 교인들이 왕래할 수 있게 하면 될 것 아니겠소. 아니면 지금 위치한 교회 옆에 대지를 구입해 교육관을 짓고, 1층은 직업 여성을 위해 탁아소로, 2층은 아동병원으로, 3층과 4층은 교육실로 사용했으면 좋겠소. 나는 전형적인 목회 목사는 아니지 않소. 목회 목사로서는 나는 부족하오. 영암교회는 목회를 전담할 좋은 목사님이 오시면 발전할 소질이 충분히 있는 교회요.”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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