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79)   

Google+ LinkedIn Katalk +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백조의 노래 ‘까치’ ③

건강한 사람 이상으로 열심히 정리 

동요 ‘까치’, 그의 마지막 백조의 노래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쓰다 가신 분

말보다 글·글보다 사랑 주고자 해

“쉬러 와서 좀 쉬시지 그렇게 무리를 하우?” 하면, “이것은 내가 빨리 정리해놔야 할 것들이라서…”라고 대답하신다. 그는 시간에 쫓기는 양 건강한 사람 이상으로 펜을 움직이곤 하였다. 그는 자기의 때가 이미 다가온 줄 알고, 평소에 하신 설교 원고를 이곳에서 정리하신 것이다. 그때 그 설교집이 그가 작고한 뒤 출간된 ‘성직자’였다.

다음 날 우리는 산책하러 집을 나섰다. 그런데 30미터도 못 가서 “더 걸을 수 없어. 숨이 이렇게 차니…”하면서 옆 바위에 걸터앉으신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까지 악화되셨나?’하면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억지로 부축해 다시 돌아와 침대에 눕게 했는데, 문밖 소나무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와서 앉더니 기쁜 소식이나 가져온 것처럼 ‘깍깍깍’ 울어댄다. 그 아름답고 빛난 아침 햇살을 받아 가면서…. 

그 소리를 듣던 황 목사님의 얼굴은 어떤 황홀한 경지를 본 소년처럼 환한 얼굴에 미소를 가득히 내뿜으면서 내게 말했다.

“박 선생, 우리나라 국조(國鳥)는 까치가 맞을 거야. 이 새는 옛날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애. 그리고 또 꽃은 진달래가 우리에게는 더 친근하지 않우? 무궁화보다는….”

오전 중 잠시 나갔다 들어온 나에게 그는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 거야. 어디 곡조가 되겠나 보우”하신다.

그 노래의 이름은 ‘까치’ 가사는 이렇다.

 

아침 솔밭에 까치 한 마리

깍깍깍 소식을 전해 왔어요.

까치가 울며는 손님이 온다지

오늘도 누구가 오려는 걸까.

언제 들어도 반가운 소리

깍깍깍 까치는 고마운 산새

오늘도 이 언덕 조그만 집에

누구가 찾아와 놀아 주려나.

아침 솔밭에 까치 한 마리

깍깍깍 기쁨을 전해 왔어요.

언제나 즐거운 까치 소리에

창문을 열고서 내다 봤지요.

나는 이 소박하고 청순한, 시골 소년이 읊은 것 같은 ‘까치’에 곡을 붙여 이틀 동안 그와 함께 노래했는데, 이 동요가 그의 마지막 백조의 노래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노래는 대광학교 강당에서 그를 마지막 보내는 예배 때 대광초등학교 합창단이 불러 많은 사람들을 울려 주었다.

이제 그린파크에서의 날도 다해 하룻밤만 지내면 집으로 내려갈 때가 되었다. 우리는 집으로 내려갈 때 곧장 우래옥에 가서 냉면을 함께 나누고 헤어지자고 즐겁게 말하면서 그 밤을 지냈다.

그 열흘 동안 고요한 데서 휴양을 했으나, 그의 몸은 여전히 병약하기만 해 온 가족들의 걱정을 더해 주고 있었다. 사실 휴양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정신적인 노동은 육체 노동의 몇 배였으니 말이다.

아침에 일어난 그분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건넸다.

“박 선생, 찬송가란 역시 ‘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하는 그런 스타일의 것이 최상이야.”

나는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어서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 내 마음속에는 이상한,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지나쳐 갔다. 짐을 추려서 택시에 싣고 산을 내려오면서도, 아침에 내게 말한 그 찬송가 스타일론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택시는 도중에서 우래옥이 아닌, 안암동 황 목사님 댁으로 향했다. 기력이 모자라서 냉면 파티는 수일 후로 미루자는 말씀이었다.

2, 3일 후 점심 때가 조금 지나서 내가 영락교회 사무실에 들렀더니, 사무실의 어느 누군가가 내게 급히 알려 주었다.

“황 목사님께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중 세상을 막 떠나셨다.”

여기 무슨 말을 더 쓸 것인가! 이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신데…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네에’ 하고 그렇게 갈 것인데….

다만 우리의 구주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쓰다 간 황광은 목사, 우리의 친구의 삶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지이다라는 한마디의 기도, 그것만이 나의 소원이다.

마음의 거문고

운명하기 며칠 전에 황광은 목사는 필자에게 엽서 한 장을 보내 주었다. 필자가 찾아 뵙지 못하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를 들면서,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찾아보지 않았고…”라는 복음서 구절까지 들먹인 데 대한 회답이었다.

편지 받으니 반갑소이다. 만나지도 못하고 누웠으니… 지금 호조(好調), 그러나 주위에서 너무 쉬라고 해서 곧 털고 일어나려던 것이 한약 신세를 또 좀 져야 할 모양입니다.

희보 형은 늘 건강에 조심하고 또 만사에 성급하게 하지 말고 대국(大局)을 보시도록! 이크, 또 설교가 됐군. 여하간 나로서는 처음으로 가지는 긴 시간이기에 생각도 가늠도 많이 하고, 또 잊었던 몇 작품(동화 따위)을 가볍게 소화해 두고 있습니다. 완쾌되면 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어차피 말보다 글을, 글보다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고아원장이어야 했을 내가 무척 말도 많이 했으니, 그렇지 않은 열매가 이젠 좀 맺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오.

이 편지를 쓰던 때가 아마 그린파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가 아닌가 추측해 본다. 발신 날짜도 적혀 있지 않고 일부인도 흐릿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다.

마지막 며칠

그린파크에서 내려와 병의 악화로 다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운명하기까지에는 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때의 상황을 다시 미망인 김유선 여사의 서술을 통해 알아본다.

산에서 집에 돌아오기 위해 준비하던 아침이었다. 짐을 챙기는 내 앞에서 황 목사는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무엇을 찾으세요?”

“오늘 아침 신문에서 오려 놓은 것이 있는데, 어디 갔나? 현상 모집하는 광고야. 1등에 자동차 한 대거든! 내가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아이들을 위해 준 것은 없는데, 자동차나 타서 줄까 해서….”

“뭐요? 당신 참 웃기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