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길] 지금은 의로운 한 사람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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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가득하여 부르짖음이 크고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조사하여 파멸하려고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여호와여 소수의 의인이라도 그들이 악인들과 함께 파멸되는 것은 당신의 정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셨다. “10명의 의인이 있다면 네 말대로 나는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성을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인가? 군사력인가? 경제력인가? 성경은 아니라고 말한다. 10명의 의인에게 한 도시와 국가적 운명이 걸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누가 이 시대의 의인인가? 

하루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그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왔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판결을 요구했다. 그들은 율법(신명기 22:22. 레위기 20:10)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이 판결로 하나님의 정의와 예수 자신이 의인임을 증명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예수를 존중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악한 프레임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한다.(요 8:6) 예수님을 성전에서 추방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프레임을 짜고 군중을 동원해 여론조작을 한다. 그리고 문제를 단순화시켜 여론몰이를 해 자신의 의도대로 결론이 나도록 압박한다. 이미 오늘의 정치판에서 활용되는 조지 레이코프가 분석한 프레임의 효과(코끼리는 말하지 마, 미래엔, 2015)의 전형이고 솔로몬 에쉬(Solomon Eliot Asch)의 동조실험에서 나타나는 여론조작 함정의 전형이다. 악한 그들의 의도가 그 날을 삼키고 있다. 그렇다. 정의도, 여론도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그들이 정의의 옷을 입은 서기관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누가 거짓과 탐욕을 정의로 포장해 정의를 도둑질하는 프레임이 난무하는 함정에서 오늘을 구할 것인가. 

예수님이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 추측하건데 이곳이 성전인 것과 하나님은 우리를 불꽃과 같은 눈으로 살피심과 그가 오늘 우리의 행위에 대해 심판하시고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임을 자각하게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셨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할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하라고 하신다. 

특히 세례요한보다 더 정의로운 예언자이며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진실에 눈을 뜬 사람들이 돌을 내려놓고 돌아간다. 의인은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이다. 정의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굴복시켜 그 명령에 자신을 순복시킬 줄 아는 사람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구현이다. 오늘 한 분이 그 날 조작된 바리새인들의 프레임과 조작된 여론몰이에서 백성을 구하신다. 그리고 피로 낭자했을 성전을 지켜내신다. 진리이신 주님의 정의가 새봄의 꽃처럼 피어난다. 그렇다. 오늘은 진리에 눈 뜨게 하는 의인 한 사람이 목마르게 기다려지는 날이다. 

권석은 목사

<용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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