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괴롭거나 슬픈 일을 만나면 술을 마신다. 술집에도 가고 집안 주방에 보관되어 있는 위스키를 꺼내어 마신다. 세상은 즐기면서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오락들을 많이 개발해서 제공한다. 모두가 다 한순간일 뿐 어떻게 이런 잡동사니 같은 일들로 마음이 달래지고 고통이 해소되겠는가! 어림없는 짓이다. 고통, 괴로움, 슬픔 등은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인데 술 몇 잔 마신다고 어떻게 해소, 해결이 되겠는가? 문제는 전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오락을 즐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예배 시작 전의 찬양 프로그램으로 예배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 매달리는 교회도 있다. 이런 일은 세상이 행하는 일과 비슷하다. 잠시 더 즐거운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지라도 매우 비성경적일 수도 있음에 주의해야 하겠다. 세상 풍조를 따라서는 안 된다. 영적인 지식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우리의 생각이 지엽적, 부분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성적, 철학적으로는 인생을 다루거나 다 설명하지 못한다. 인생에는 그 깊이를 측량할 길 없는 비참함이 있다. ‘장엄한 미지수’ 같은 것이 있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인간은 정욕과 탐욕을 가지고 있다. 시기와 질투, 갈등과 혼란, 인식과 감각의 존재다. 이런 것이 우리의 체질이다. 눈을 들어 ‘신비로 가득한 우주’를 보라! 신비와 기이함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동로마 마우리키우스(F Mauricius, 539~602) 황제는 명군(名君)의 반열에 올리는 학자도 있을 정도이나 포카스(Phocas, 602~610 재위)의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아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보았을 그때의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주여!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언제나 의로우십니다.” 참으로 놀랍고 견고한 신앙 고백이다.
역사는 어떻게 작용하여 가는 것일까? 진화의 개념으로 모든 역사의 설명이 가능한가? 종(種)의 기원(起源)(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1859)의 저자 찰스 다윈(C R Darwin, 1809~1882)은 자신의 인생 끝자락에 왔을 때 시와 음악을 즐기는 힘을 잃고 자연 자체를 감상할 힘마저 잃어버렸다고 전해진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인간의 모든 문제는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웰스(H G Welles, 1866~1946, 영국의 대문호, 문명비평가, 공상과학소설 창시자)는 기독교의 죄와 속죄와 구원 교리를 비웃었다. 그가 의지한 것은 인간의 이지(理智)와 이해력이었다.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었을 때 자신이 전적으로 실패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인생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저서가 ‘한계에 이른 이지’(Mind at the end of it’s Tether)였다. 악인에게 죄는 무서운 것이다. 악인의 길은 어둠과 같다. 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을 앞두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9) 예수를 알고 믿는 온전하고 정직한 자,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하다.
사도 바울의 죽음을 앞둔 장엄하고 위대한 고백이다. “전제(奠祭)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義)의 면류관(冕旒冠)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허풍스러운 자랑과 영광은 한낱 잠시 피어오르는 연기같은 것에 불과하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제(奠祭)와 같이 부어지는 삶이 되기를 진실로 원하며 기도한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