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주기철 목사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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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가치…이 땅 아닌 하늘나라서 찾아

고난의 신학 하다가 고난의 길로 간 고난의 종

주기철 목사의 본래 이름은 기복(基福)인데 오산학교 시절 그 이름을 기철(基徹)로 개명했다. 기철(基徹)이란 이름은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또 그의 아호 ‘소양’(蘇羊)도 야소(耶蘇: 예수)의 ‘소’자와 ‘양’(羊)이 합해진 것으로 ‘예수의 양’이라는 뜻이었다. 예수의 양으로 제사 제물이 된다는 뜻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과 순교신학의 근간은 내세에 대한 확실한 신념에서 출발했다. 

주기철 목사는 “아버지의 집은 내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늘나라 황금 길에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하게 하사 영광의 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이라는 자신의 고백처럼, 참된 행복과 가치를 이 땅에서 찾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찾았다.

1934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를 인도할 때 주기철 목사는 모든 목사 후보생들에게 고난의 십자가를 질 각오를 다시금 가다듬자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다른 것으로 우리 한국교회에 비칠 것은 없습니다.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르는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주를 따르는 죽음은 주기철 목사의 삶의 목표였고, 그 목표는 삶의 결론이 되었다. 그는 고난의 신학을 하다가 고난의 길로 간 고난의 종이었다.

암울했던 일제 말엽, 그때는 산천도 초목도 숨죽였고,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혹은 강요로 친일, 부역하거나 아니면 시골로, 해외로 은신하거나 도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온몸으로 일제와 겨루어 싸웠던 민족교회의 선각자들로 인하여 우리 교회의 역사는 완전 몰락, 파멸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우리 민족과 교회가 어두운 시대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동안 한국기독교 소망의 빛으로, 우상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수많은 신앙의 변절자들을 짓누른 채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우뚝 선 신앙인의 표상으로 오늘도 우리 앞에 엄숙히 다가서 있다.

흔히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이야기할 때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불의한 세력 앞에 죽기를 각오하고 투쟁하는 순교적 영웅을 기리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후스”, “교황 앞에 선 루터”로 불리는 주기철 목사에게 이런 영웅적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영웅적 묘사와 수식이 자칫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훼손하는 오류를 낳는다.

예를 들어, 주기철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불타는 못 판 위를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주기철 목사의 용기와 신앙이 참으로 대단하다”라고 감동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저런 처지에 처한다면 나는 못할 거야. 순교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지”라고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그럴까?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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