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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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마음의 거문고 ③

한국 복음화 운동의 총무로 최선

이 땅 모든 목자들의 좋은 본보기

하나님 종이란 확고한 사명 의식

목사답게 진실하게 살다 간 목사

제5회, 제6회 전국기독교 교육대회는 당신의 땀과 노력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고, 그때 성황을 이루었던 모습들이 사진으로 남아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며 당신을 흠모하오.

한국 복음화 운동의 실무 총무로서 동분서주하며 힘에 겨운 업무량을 감당하느라고 얼굴은 여위고 몸은 파리했어요. 그러나 일은 해야 한다고 힘쓰고 애쓰던 모습 이제는 다시 찾지 못하겠구료.

교회 양떼를 사랑하되 자기 몸같이, 아니 자기 몸보다도 더 사랑해 아끼고 쓰다듬던 모습은 이 땅의 모든 목자들이 본받을 좋은 본보기였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겠지요. 

이제는 이런 일들은 다 옛 일이 되었고, 당신은 하늘 나라에서 새 일꾼으로 새 일을 시작한 줄로 내가 믿으오.

당신의 별세를 슬퍼하는 유족과 친지와 교우와 또 그 밖의 여러 사람이 당신을 전송하오. 부디 하늘 나라에서 귀한 일 더 많이 하시오. 그리고 유족들에 대한 부탁을 아버지 하나님께 친히 말씀드려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미망인과 네 어린이의 앞날이 행복하기를 비나이다.

 다음은 황광은 목사 1주기인 1971년 7월 15일에 그의 친구 조덕현 목사가 쓴 추모기이다.

 

우리의 다정했던 친구 황광은 형이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망각의 은혜를 주신 것 한편 감사하면서 한편 애석한 느낌도 없지 않다.

1년 전 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삼일 기도회를 인도하러 나가다가 듣고, 순간적으로 앞이 캄캄했다. “이게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전해 주는 홍 형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때 심정 같아서는 나의 하는 일에 큰 실망과 용기를 잃게 해주었으나, 어느덧 1년이 지나 그의 추도일을 맞으니 이렇게 몰인정한 내가 되었나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책감을 갖게 한다. 하기야 잊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랴. 잊게 해 주시기에 또 다른 희망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황 형이 세상을 떠나 장례 예배를 드리던 날 마침 비가 내렸고, 제헌절 공휴일이어서 대광의 강당에는 그를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던 분들이 너무나 많이 모였었다. 정말 꼭 필요한 분이 가셨다고 모두가 눈물 흘렸다. 그의 가심은 한국 교회와 사회의 큰 손실이었다. 황 형이 없는 교계는 너무나 쓸쓸한 것만 같다. 황 형을 아끼던 몇 분 동지들이 그의 가심을 너무 아까워하고 슬퍼하던 중 무엇인가 그의 유작을 남기고 싶어 몇 권의 책을 출판했었다. 나는 얼마 동안 서울을 떠나 있다가 돌아와서 그의 설교집인 ‘성직자’를 받았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빨리 갈 줄 미리 알았었는지 그의 생전에 말도 없던 설교집을 출판하기에 서둘렀다. 그리고 책의 제목을 ‘성직자’로 고집했다. 왜 그가 이 책의 제목을 ‘성직자’로 고집했는지 모르겠다. 그가 세상을 가고 보니 그는 성직자의 소명 의식이 너무나 철저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성직자로서의 그의 설교문을 읽고 그의 맑고 밝고 깨끗한 마음을 보았다. 교우들에게 자기를 가리지 않고 있는 대로 소박하게 말할 수 있었던 그의 소신과 그러면서도 그는 인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란 확고한 사명 의식에 크게 배운 바 있다. 그는 목사님을 그대로 나타내었다. 자랑할 것 없는 그의 모습,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옳게 살다가 그는 갔다.

그는 목사이면서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가 교역자에게 하는 대접을 번번이 사양했다. 주는 사례를 자신이 오히려 많다고 돌리는 행실을 보였다. 결코 빈말이 아니라 주는 것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분수 이상의 것을 받기를 어느 곳에서든지 거절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다. 목사답게 살다가, 목사로서 너무나 진실하게 살다가 가셨다.

자기 일보다 남의 일에 언제든지 도와주기를 즐겨하던 황 목사였다. 세상이 그를 너무 마음이 좋고 제 일을 등한히 한다고 하면 오히려 섭섭해 한다. 그는 세상에서 미련한 자 둔한 자로 살았다. 아무 것도 없이 살다가 가셨다. 그가 남긴 것이란 우리 가슴에 그를 잊을 수 없는 숨은 유산이다. 그는 다 주고 가셨다. 그러기에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해 하는 수많은 분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시지 않는다면, 누가 먼저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잊어버리고자 한 그 날이 다시 돌아온다. 그와 같은 믿음의 삶, 의의 삶, 사랑의 삶, 진실의 삶을 다할 수 있는 목사가 또 있기를 바라면서 황 형이 두고 가신 그의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가 다시 함께 하시기를 빈다.

경춘선의 한가한 역, 경기도 양주군에 소재한 퇴계원에 화해의 사도 황광은 목사는 말없이 누워 있다. 그가 간 지 30년이 지났으나 그의 해맑은 미소는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는 계속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황광은 목사는 맑고 너그럽고 착하셨다.

그의 생애는 짧으나, 하신 일은 크고 고우시다.

그는 고아의 참 벗이었고, 불우 소년의 길잡이였다.

이름 높은 아동 작가였고, 훌륭한 설교가이었다.

아! 황광은 목사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한국 기독교계의 화해의 사도.

그러나 그의 삶은 너무나 짧으셨다.

1923년 2월 25일에 평북 용천에서 나시고, 1970년 7월 15일 그가 시무하시던 영암교회에서 돌아가셨다.

<끝>

※그동안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부터는 안영로 목사님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눈물과 땀의 발자취 ‘전라도가 고향이지요’가 연재됩니다.

 – 편집자주 –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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