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만약 지금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일류대학에 진학하기는커녕 일찌감치 학업부진아가 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우리 교육제도를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 학업성적이 좋지 못했고 교사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스위스의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 지원했으나 수학 이외에는 다른 성적이 형편없어서 1년간 고등학교에서 더 공부하는 조건으로 겨우 입학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대학 시절에도 교수들의 강의에 흥미가 없었고 가끔 엉뚱한 질문으로 교수들을 화나게 할 뿐이었으므로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프로이센의 엄격한 군국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주입식 교육이 팽배한 대학의 분위기에 아인슈타인은 적응하지 못했고, 교수들은 강의에 집중하지도 않고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아인슈타인을 그 재능을 알아보고 높게 평가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졸업하면서 교수의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할 수가 없었다.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겨우 스위스 특허국의 비정규직 직원으로 채용이 되었지만, 학력에 전혀 맞지 않는 단순 계산 작업이나 하는 일이 주어졌을 뿐이다. 그래도 그는 얼른 주어진 일을 마친 다음 나머지 시간에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는 이중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특허국 직원으로 일하면서 3년여 동안 틈틈이 혼자 연구를 이어간 끝에 대학 졸업후 5년, 26세 되던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포함한 네 편의 논문을 한꺼번에 발표하여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물리학자로서의 일생이 시작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물리학계에서는 1905년을 기적의 해로 부를 만큼,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쓰는 경이적인 업적이었다.
요컨대 아인슈타인은 우리나라와 달리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교육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공적인 물리학자로 성장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런 억압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교수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자유로운 정신이야말로 아인슈타인과 같이 독창적인 발견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학생들은 대체로 너무나 교수의 권위에 쉽게 굴복해 버린다. 교수의 말 한마디를 무슨 경전과 같이 받아들이고 학습하는 것이 우리나라 학생들의 일반적인 태도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기존의 이론을 습득하고 익히는 데는 매우 유능하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사고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유의 정신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 ‘자유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민주주의가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할 수 있지만, 다수의 횡포에 노출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고, 다수의 압제로부터의 자유가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개인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지키고 독립적인 사고를 함으로써만 참된 자유인이 되고 독창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서양은 일찍이 이런 자유의 정신을 기르는 교육을 해왔고 아인슈타인과 같이 독창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낼 수 있었다.
결국 우리나라 교육을 살리는 길은 입학시험과 같은 제도의 개혁보다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철학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를 조성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김완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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