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은 한글창제 제579돌 한글날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 곧 오늘의 한글을 창제해서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우리 글자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이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은 한글, 즉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국보 제70호이며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세종은 1443년에 훈민정음 창제를 마무리하고 1446년에 8인(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과 함께 훈민정음 해설서인 이른바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다.
문자이름과 책 제목이 같다 보니 훈민정음 해설서는 해례본이라 부른다. 해설서 내용 가운데 훈민정음 제자 원리를 설명한 부분이 ‘해례’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창제도 해례본 간행도 기적이지만 이 책이 1940년에 발견된 것도 전형필 선생이 소장하게 된 것도 기적이었다. 1446년 간행한 해례본은 소장자 간송 전형필 선생의 호를 따서 흔히 간송본이라 부른다. 해방 이후에 밝혀지지만 발견자는 이용준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김태준과 함께 전형필에게 매각했다.
최현배 선생은 1942년 출간된 『한글갈』에서 원본 고증과 소장자를 최초 공개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전문 인쇄본을 수록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발견된 곳이 안동 와룡면 주하리 이용준 친가인지, 인근 가야리 장인댁 궁구당가인지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해례본은 1940년 이한걸의 3남 이용준에 의해 스승인 김태준 교수를 통해 간송 전형필이 구입해 6·25전쟁이 나자 오동나무 상자에 이 책만 넣어 피난을 갔고 밤에는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금은 국보 70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당시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해례본』 이야기를 했고,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1천 원을 찾아와 1천 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 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당시 전형필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이 책에는 한글 창제 원리의 소개 외에도 훈민정음이 정확히 언제 반포 됐는지도 표기가 돼 있어서 10월 9일이 한글날로 지정될 수 있도록 하는 근거가 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판본은 안동본(간송본)과 상주본 단 둘 뿐이다. 소재가 알려져 있는 것은 안동본(간송본)뿐이나 안동본을 통해 영인본이 제작되어 연구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한편, 상주에서 발견된 훈민정음도 재판과정에서 안동 광흥사에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언급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 간행 494년만인 1940년에 발견되고 반포된 지 551년, 발견된 지 57년만인 1997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이 책의 가치를 세계가 인정한 셈이다. 영국의 역사가 존맨(Jone Man, 2001)은 “한글은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알파벳의 대표적 전형으로 알파벳이 발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 주는 최고의 알파벳이다.”라고 했다.
2021년 안동에서 개최한 「21세기 인문가치포럼」 개막식 특별 세션에서는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 알브레이트 후베 덕성여대 교수,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등이 참여해 훈민정음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했다.
훈민정음 해례에서 밝힌 주요 가치인 민주정신, 과학정신, 철학정신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의 가치와 세종대왕의 학문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아울러 훈민정음의 수리적 특성의 의미를 밝혀 음양론이라는 이진법을 통해 세계 어떤 글자보다도 글자의 디지털화에 앞장섰음을 강조했다.(김슬옹, “인류문명의 기적,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본 뒷이야기”)
현재까지 알려진 2종의 훈민정음 생산지는 안동이다. 권씨 부인의 선반가(1526년),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1549년),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1565년) 등. 또한 1586년(선조 19) 안동 고성이씨 이용태(1555-1586)의 묘지에 아내가 쓴 ‘원이 아버님께, 병술년 유월 초하루날 집에서’ 글도 안동이다.
한글을 교육적 차원에서 수용해 유학의 성취를 의한 도구문자로 활용한 조선전기 안동지역 서당으로 활용한 사례들도 「영가지」기록에서 확인된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사대부들이 한글 시가 작품인 가사나 시가를 대량 창작했고 여성들에게는 국문으로 번역된 소설이 보급되었다. 따라서 안동지역에서는 글쓰기 특징의 하나로 타 지역과는 달리 여성의 글쓰기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천명희, “광흥사 한글을 꽃피우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비록 부인이라도 또한 훈민정음의 상생상변(相生相變)하는 이치를 밝게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말하고 편지하는 것이 촌스럽고 비루하여 격식을 갖출 수 없다.”고 했다. 현재 UNESCO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국보1호의 가치가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안동본’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안동은 명실공히 훈민정음 해례본의 ‘본향’이다.
조상인 장로
<안동 지내교회, 고암경제교육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