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서는 매년 3월 1일 전후 1919년 당시의 3·1만세운동을 재현하는 거리행진이 펼쳐진다. 안동교회, 광복회 안동시지회와 안동청년유도회 등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이 재현행사는 안동시청에서 출발해 안동교회를 거쳐 웅부공원까지 이어지는데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고, 웅부공원에서의 타종식으로 마무리한다. 안동의 3·1만세운동은 두 트랙에서 시작되었는데, 우선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재명이 서울에서 발생한 3·1만세운동의 실태와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정보,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그의 부친인 안동교회 김병우 장로에게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당시 동경 유학생으로서 2·8동경독립선언에 참여한 강대극이 일본에서 귀국해 고향인 안동으로 귀향해 민족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과 접촉한 후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해 시위 날짜를 정했지만 거사 하루 전날인 3월 12일 일경의 검거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1919년 3월 13일 안동 장날, 영양과 영덕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던 이상동 조사의 단독시위는 3·1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태극기를 그린 방패연을 등에 메고 안동의 중심가인 신한은행 앞에서 삼산 우체국으로 달려가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상동 조사의 1인 시위는 안동 3·1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모의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5일이 지난 3월 18일 낮 12시경, 안동교회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 조사의 만세 호창에 따라 교인 30여 명이 신한은행과 농협안동지부 중간 지점인 삼산동 곡물전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만세를 외쳤으며, 때마침 천전의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유림에 의해 주도된 다른 시위대와 장터에 모인 읍민들도 합세하면서 안동읍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적지 않은 도민들이 구속되었는데 안동교회 교인 7명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안동군 11개 면 중에서 안동·예안·임동·길안·풍산 등 5개 면의 시위 주도세력은 기독교인이었다. 안동지방에서 대규모 군중에 의해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예안으로 만촌교회(현 예안교회) 교인들은 교회에서 은밀하게 태극기 수백 장을 제작해 3월 17일 시위를 주도했다. 3월 21일에는 임동, 임하, 길안, 일직 등 4개 면에서 기독교인의 주도로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21일에서 22일까지 임동과 사월에서 일어난 시위는 안동지역 가운데에서 가장 과격한 모습을 보였으며 무려 67명이 재판을 받았다. 임동시위에서 구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임동교회의 김성복과 류연성이다. 당시 61세 김성복은 아들 치경과 함께 임동 쳇거리장터에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각각 1년 6개월과 3년이란 실형을 받았다. 또한 독립만세를 앞장서 부르다가 체포된 63세의 류연성에게 선고된 징역 7년은 안동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최고형으로 알려져 있다. 선고를 받은 후 6달이 지난 1919년 9월 25일, 그는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3월 21일에 발생한 길안면의 시위로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은 15명 가운데 주동자들은 오대교회 교인이었으며, 3월 24일 풍산 시장에서 발생한 시위의 주도자 역시 교인 30여 명이었다.
이처럼 유림의 고장으로 알려진 안동지역에서 교회의 주도로 기미년 3·1만세운동이 발생한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교회가 항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순한 애국심을 넘어 교회가 신앙과 공의에 기초한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이었다. 유교를 근본사상으로 하는 조선의 붕괴로 혼란을 겪고 있던 때 교회가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시대적 사명과 민족적 책임을 감당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침체의 늪에 빠진 오늘의 교회가 시대와 민족 앞에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김승학 목사
<안동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