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나는 부임하자마자 1학년 B반 담임을 맡았다. 이 학교는 여러모로 특색이 있는 학교였는데 첫째 이 학교는 교사들이 조회 시간 전에 반드시 <다락방>이라는 책으로 아침 경건회를 하는 것이었다. 선생들이 순번으로 돌아가며 다락방을 읽고 깨달은 바를 말하고 기도하였다.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대중기도를 안 해 본 나는 기도문을 써 와서 읽는 것인데 진땀을 뺐다. 그런데 이도 익숙해졌다. 한번은 <짐을 서로 지라>(갈 6:2)는 제목이 있었는데 평소에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었다. 내 짐도 버거운데 무슨 짐? 했다. 그런데 한 그림을 보았다. 한 줄로 모두 짐을 지고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는데 뒷 사람이 앞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그림이었다. 나는 감명을 받고 그 그림을 크게 그려서 교사들에게 보여 주면서 “내 짐도 무거운데 남의 짐을 어떻게 지느냐고 불평이었는데 이렇게 서로 도우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겠다”라고 말했더니 학교를 떠난 먼 훗날 이때 이 그림 이야기를 해 주는 교사가 있기도 했다. 둘째 채플이라고 전교생이 점심 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평소에 교목이 예배를 인도하고 각 담임은 학생들을 인솔하고 강당에 들어갔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음악 선생이 음악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잊히지 않은 것은, 합창 지도를 하는 음악 선생이 전교생에게 찬송을 가르치는 것이 환상적이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는 앉은 좌석 별로 경쟁을 시키며 정확한 멜로디와 아름다운 발성을 가르쳤다. 드디어는 마음속에 리듬감이 생동하게 한 뒤 녹음테이프를 통해 전문 가수가 이 찬양을 은혜롭게 부르는 것을 듣게 했다. 그리고 전체 학생들에게 찬송하게 해서 자기네가 일류 가수가 된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했다. 다음은 찬송가 해설이었다.
호레이시오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는 시카고의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러나 1871년 시카고의 대화재가 그의 재산을 다 쓸어 가 버렸다. 이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서기 위해 1873년 그는 아내와 네 명의 딸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기로 했다. 그해 11월 15일 가족이 떠날 때 자기는 갑작스러운 일로 홀로 남았다. 그런데 22일 새벽 2시 그 배는 대서양에서 영국의 철갑선과 충돌하여 226명의 생명을 안고 바다로 침몰한 것을 알게 되었다. 자녀를 잃고 홀로 구명된 아내가 영국에서 보낸 전보로 스패포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나 며칠 뒤 아내를 데리려 영국으로 떠났다. 그는 선장의 초청으로 선장실에서 차를 마실 때 선장이 이 배는 지금 딸들이 침몰한 바다 위를 가고 있다고 말했다. 선실로 돌아온 그는 과거의 아픔과 슬픔이 되살아나 밤새도록 울었는데 새벽녘 3시에 알지 못한 평안을 체험했다. 그때 쓴 시가「나의 영혼은 편하다(It is well with my soul)」라는 시였는데 이것에 곡을 붙인 찬송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다.
그러면 소녀들은 찔끔찔끔 울곤 했다. 그럼 감동한 학생들에게 작사자를 생각하며 마지막 찬송을 부르자고 말한다. 나는 찬송 속에 그런 사연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정말 동화 속에서 사는 것 같은 학교였다.
이 학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감을 맡겨서 교사들을 아침 일찍 나와 밤늦게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서무과장은 이 학교 선생들은 낮에는 너무 바빠서 사회생활은 못 하고 집에서 애 낳는 일밖에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여기 와서 광주의 친구들은 까맣게 잊고 살고 있었다. 2년쯤 지나 정신이 들어 광주의 친구 김○○에게 편지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는 내 결혼 때 결혼 청첩장을 만드는데 돈이 없어 시계와 옷을 저당 잡힌 친구다. 답장이 없어 수소문해 봤더니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친구를 찾지 못한 과거로 가책을 느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