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한미성 교장 <1>

Google+ LinkedIn Katalk +

내가 기전학교에 있으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은 한미성(韓美聲) 교장이었다. 한 교장은 가끔 개척교회에 설교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나를 불렀었다. 그분은 한국의 고무신을 사서 미국으로 보내고 그것을 판 돈으로 시골에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일마다 학생들이나 교사들을 교대로 데리고 설교하러 갔다. 참으로 신앙을 삶으로 보여 주는 분이었다. 나는 서툰 영어를 하면서 그와 동행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뿐 아니라 한 교장의 설교 원고를 번역해 주는 것도 기쁨이었다. 가는 길 오는 길에 한 교장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 교장이 어려서부터 선교사를 지망했던 이야기다. 자기가 9살 때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선교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했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셨다고 말했다. 얼마나 선교사가 되고 싶었는지 선교 본부에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느냐고 묻는 편지를 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그 대답은 “무엇이나 잘 먹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래서 지금도 자기는 편식을 하지 않고 어떤 한국 음식이든 잘 먹는다고 했다. 

둘째는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한국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노고단에서의 선교사들의 피서 생활을 고국에서 읽고 한국 선교사로 가면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노고단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1955년에 내한해 맨 먼저 친구와 함께 올라간 곳이 지리산이었다. 캠핑 도구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점심을 해 먹는데 거기서 그녀들은 어떤 산 사람을 만나 크게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알아보니 그것이 공산군 빨치산이었다. 하산 후 경찰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한국 선교부에서도 조심하라는 충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호기심이 많은 용감한 분이었다. 

셋째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겨울 교복을 새로 바꾸기로 한 때였다. 어떤 교복으로 할 것이냐가 논의의 대상이었다. 몇 가지 패턴을 놓고 의견을 교환하되 육군 사관학교의 조발 때 머리 길이를 결정하는 방식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들은 머리 길이를 1, 2, 3센티 어느 것으로 하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학생 셋을 뽑아 1, 2, 3센티로 머리를 자른 후 단에 세워서 바라보고 결정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도 세 가지 패턴의 옷을 해 입혀서 패션쇼를 하여 민주적으로 교복을 정하기로 하였다. 선생들은 모두 어떤 옷이 예쁘냐 하는 것에 열을 올렸는데 한 교장은 모든 교사의 의견을 듣고 있다가 “어떤 옷이 겨울에 여학생들의 몸을 따뜻이 하고 보호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열중해서 옷의 근본적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전여고의 교복은 코르덴으로 된 자주 색깔의 옷으로 결정이 되었는데 이런 옷은 전국에서도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교복을 입고 전국 합창대회에서 우승하여 이 교복을 전국에 크게 소개한 적도 있다. 한 교장은 예쁜 옷 보다는 입는 사람이 중요했었다. 기독교 가치관의 차이였다.

그분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31세의 처녀로 문화도 역사도 익숙하지 못한 한국의 한 여학교 교장을 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57년 기전학교의 제9대 교장에 취임하면서 광주 수피아여고에 교장으로 있던 경험 많은 유화례(Florece E. Root) 선교사에게 지혜를 구하고 그분이 추천한 그 학교의 학생처장을 교감으로 초청했다. 처음 면접에서 조 선생은 부임을 반대하고 떠났는데 한 달 동안 기도한 한 교장은 “한 달 기도했습니다. 무조건 부임해 주세요”라는 강력한 편지를 냈는데 조세환 선생은 결국 교감으로 부임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