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68)
구미에서 상주까지 (16)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성서학자이다. 필자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그저 배위량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가운데, 그를 알기 위하여 노력했고 그가 1893년 4월과 5월에 걸었던 영남지역의 노정을 따라 걸어 보고 그가 걸었음직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어렵고 힘든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그 길을 걸었던 시절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등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배위량의 흔적을 추적하는 사람이다. 물론 배위량을 알기 위해 그에 관해 연구도 했고 논문도 쓰고 이것저것 구상하고 순례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배위량에 대한 논문과 저술을 참조하기도 했지만, 주로 혼자 그 먼 길을 찾아 걸었고 때로는 주위의 관심있는 사람들과 함께 걷기도 했다.
배위량에 관한 저술과 논문을 여러 번 대하는 사람이지만, 역사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가란 입장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필자가 볼 수 있는 부분이라도 보고 찾아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노력한다. 배위량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의 논문이나 저술에 더하여 필자의 이러한 이해와 추적과 이런 글들이 읽혀져 후진들이 배위량을 연구해야 할 당위성을 찾게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어떤 교회사 학자가 배위량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낄 때 연구할 수 있는 터전이 이미 형성되어 있다면 유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무슨 큰일을 이루고자 함이 아니라, 이런 토대를 만들어 주는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잠깐 머물다 본업인 성경 연구로 돌아갈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의 배위량 연구가 지금까지 눈에 띄게 활발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필자가 이런 일을 주선하는 형편이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하는 과도기적인 시간을 살아간다. 이러면서 필자는 지금까지 배위량의 흔적을 탐색하고 있다.
이번 호의 서론이 너무 긴 것 같다. 이런 사실을 적시함은 지금부터 해야 할 바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 때문이다. 다른 학자와의 논쟁은 피하고 싶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런데 필자는 비역사가의 입장인데 역사가의 역사적인 견해를 밝힌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주장과 다른 주장을 해야 한다면 부담이 된다. 언급을 하지 않고 피해서 지나가든지, 그런 부분은 아예 언급을 하지 않고 역사가의 입장을 따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가 역사가가 아니지만, 1.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지켜야 한다는 것, 2. 배위량이 순회 전도 여행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흔적을 찾고자 시작한 일이라 세세한 시간과 세세한 노정은 지금 시절에 소수의 무리들, 혹은 혼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대략적인 노정(路程)과 일자(日字)를 찾아야 순례의 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겠기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오고 있다.
이 일의 시작 즈음이었던 2016년 배위량 순례길 탐방과 순례 일정을 위하여 청도기독교연합회 임원과의 만남 때였다. 그때 필자는 배위량 선교사가 청도를 거쳐 대구로 들어간 일정(日程)과 여러 가지 상황과 청도가 대구 선교의 길이 된 지역임을 말하며 배위량 길을 찾아야 할 당위성을 말했다. 그때 어떤 임원분이 필자의 제의에 대하여 “그 일에 대하여 공감은 하지만, 배위량의 청도 입성 일정이 틀린다.”고 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때 필자는 배위량에 대한 지식이 미천하여 김인수가 리차드 베어드의 일기를 터전을 집필한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을 번역한 『배위량 박사의 한국 선교』란 책에 근거하여 배위량이 1893년 4월 20일에 밀양 땅 ‘유천역’(‘YoO Chyun Yuk’)에서 잠을 잔 후 21일에 청도 안새월(Ansaipyuri) 마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잠을 잔 후 4월 22일에 안새월에서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출발한 것을 말했다. 그때 청도기독교연합회의 한 임원이 “유명한 교회사 교수 한 분이 1893년 4월 22일에 배위량 선교사가 밀양에서 청도에 들어오셨다고 하셨고 그분의 주장대로 청도와 대구 사이에 있는 팔조령 꼭대기에 청도 100주년 선교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그렇게 틀리게 말씀하시면 안된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하루 사이의 차이였지만, 필자가 주장을 꺾지 않자 함께 동행했던 한 교수가 “하루 차이인데, 이분들 도움을 받으려고 여기 와서 자꾸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안된다. 이분들 주장이 맞다고 받아들이자”고 의견을 내었다. 그래도 필자가 주장을 꺾지 않자 당시 청도기독교연합회 회장이었던 조삼수 목사께서 중재안을 내었다. “청도기독교연합회는 유명한 교회사 교수님의 고증에 따라 배위량 선교사가 1893년 4월 22일에 선교하기 위하여 청도에 들어왔다고 알고 있었고 그 주장에 따라 팔조령에 선교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배재욱 교수는 4월 22일은 배위량 선교사가 대구에 들어간 날이고 청도에는 4월 21일에 들어 왔다고 하시니 배교수께서 책임지고 이 일정에 대하여 정확하게 연구하신 후 청도기독교연합회 모든 회원 앞에서 강연을 한번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과제를 주었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청도기독교연합회에서는 여러 번 연합회 차원에서 순례행사에 참여하고 순례 행사에 지원을 해 주었다.
이런 경험은 배위량 길을 탐방하기 위하여 현장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하여 배위량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하는 당위성이 되었다. 그런데 청도에서의 이 경험은 내가 알아야지 남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타인의 주장에 갈팡질팡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의 정확한 일정과 노정을 세세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배위량이 잠을 자고 머물렀던 중요 거점지역과 개괄적인 노정이라도 정확하게 알아야 겠다는 마음으로 탐방을 행하고 글을 쓴다.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의 정확한 일정과 노정을 재구성하는 데 배위량의 일기가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어떤 일에 관해서는 불확실하게 표현된 것들은 탐방한 현장의 형편을 이해하고 그 당시 시대사와 현장 사정을 고려하여 재구성하는 어렵고 힘든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장로신문에 연재하는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에 관한 글은 1회부터 지금까지 이런 과정을 통하여 나왔다. 전문가인 교회사학자들이 이 일을 행한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잊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어 배위량에 대하여 비전문가인 성서학자의 주제넘은 이러한 일이 배위량 연구와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초기 한국 기독교의 영향을 선교, 교육, 문화적인 측면에서 연구할 수 있는 작은 터전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