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 사는 한 주부가 색다른 이색광고를 낸 일이 있다. “남편을 염가로 양도합니다. 사냥 도구와 골프채 그리고 사냥개 한 마리를 덤으로 드립니다.”였다. 광고가 나간 후 이 주부는 많은 전화를 받았다. 그중엔 남편은 필요 없고 사냥 도구와 사냥개만 양도할 수 없느냐고 문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이미 이혼한 주부들은 이혼 후 겪은 어려움과 후유증을 말하며 말리기도 했다. 이혼 후 자녀 양육과 교육이 힘겨웠다, 외롭다 등을 말하며 웬만하면 참고 살라는 충고들이다. 이혼을 하면 또 다른 행복의 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고 보니 행복의 열차가 아닌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한 사람들의 70~80%는 후회를 하는 것이다.
좋아하던 것도 싫증나면 바꾸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변덕이다. 주부들에게 바꾸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남편과 가구’라고 한다. 꼭 있어야만 하는 필수품인데도 시들해지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다. 남편과 가구에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말이 없다. 감정의 교감이나 소통이 안 된다. 세월과 더불어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진다. 쓸모나 값어치도 떨어진다. 오래될수록 칙칙해지고 매력도 없다. 꼼짝도 안 하려고 한다. 때때로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아무데나 버릴 수도 없다. 버리는데도 돈이 들어간다. 버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같이 있어도 좋지를 않다.
어느 시인은 ‘가구’라는 시로 부부관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랬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시어 속에 삶의 생기가 없다. 칙칙하고 무생물 같은 느낌이다. 기대나 기쁨도 없다.
나는 40여 년 전 자개로 정교하게 만든 장롱을 구입한 일이 있다. 아내가 갖고 싶어 했던 자개장이었다. 그때 내 딴엔 큰마음 먹고 구입했다. 아내는 그 자개장롱을 바라보며 행복해 했다. 자개로 만든 송아지 모양 그리고 각종 동물들 문양을 감상하고 계수도 하며 마냥 즐거워했다. 그 장롱은 겉모양이 매우 아름답다. 안에는 각종 옷가지를 걸기도 하고 침구를 넣어놓기도 한다.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더니 시들해지고 말았다. 이제는 쳐다보는 일도 관심도 없다. 그렇게 좋아했고 사랑했었는데도 말이다. 우리 부부도 접시꽃 같은 사랑에서 오래된 가구와 같은 사랑으로 변질된 것이다. 접시꽃이 아니라 하늘같다던 나도 목석같은 가구쯤으로 추락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가족이니까 괜찮겠지, 잔소리를 해대도, 조금 큰소리를 친다 해도 이해하겠지, 구습에 젖어 노부부들이 무덤덤하게 살아간다. 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입만 열면 잔소리이고 지적이고 교훈이다. 그래서 가정에 웃음이 없다. 냉기가 도는 거실에는 TV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집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서툴고 미숙한 것이다.
건배사로 ‘오이지’를 외쳐보고 싶다. “오해를 이해로 풀면 지금부터 행복이고 살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배우자를 바꾸어 보려는가. 바꾸어 보았자 그놈이 그놈이다. 언덕을 피하려다 태산을 만난다. 대박을 바라다가 쪽박을 찰뿐이다. 장석주 시인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그래도 지금까지 맞추며 살아온 놈, 천둥 맞고 벼락 맞으며 몸으로 얽히고. 맞추며 애증으로살아온 웬쑤같은 놈 그놈이 최고다. 그놈밖에 없다. “오이지”
두상달 장로
• 국내1호 부부 강사
• 사)가정문화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