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는 제1차,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세계적인 전쟁영웅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즉 트루먼, 맥아더, 이승만, 그리고 백선엽 장군이다. 이 네 분 중 한 사람만 없었어도 한국은 위기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맥아더는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은인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그는 1880년 아칸소의 리틀록에서 스페인전쟁과 필리핀전투에서 공을 세운 맥아더 2세(Arther MacArthur jr: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1917년 대령이 되었다. 1919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귀국하여 웨스트포인트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다음해인 1920년에 장군으로 승진되었다.
1922년 필리핀 주둔 사령관, 1926년 볼티모어에 있는 제3군단장,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한 제9군단장을 거쳐 11월 대장 승진과 함께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37년에 퇴역하였으나 일본이 동남아를 침략하고 세력 확장에 나서자 1941년 7월 현역 소장으로 복귀하여 다음날 중장으로 진급, 필리핀 주재 미극동군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 다시 대장으로 승진, 연합군 남서태평양사령관이 되어 대일전(對日戰)에 돌입, 1944년 7월 필리핀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고 5성 장군(元帥)이 되었다. 그 후 일본 본토 공격을 준비,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8월 15일 항복을 받고 9월 2일 미 해군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아냈다. 그 후 퇴역할 때까지 일본을 떠나지 않고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일본을 다스렸다. 특히 일본의 비무장화와 일본천왕은 신(神)이 아니라 인간임을 명확하게 깨우쳐 주었다.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북한 공산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에서 국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날아와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워싱턴에 미지상군의 파병을 요청한 사람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흑석동 부근의 한 참호에서 국군병사와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눌 때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 나라는 꼭 살려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7월 7일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고, 8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이로써 맥아더는 한국방어의 전권을 부여받고 참전 16개국의 군을 지휘하여 낙동강 방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한국 방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률이 5,000분의 1이라는 최악의 조건이었으므로 모든 참모들이 반대했지만 예리한 판단력으로 밀어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통일의 희망을 갖고 압록강까지 북진했을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다시 위기에 빠져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3년1개월 동안 전쟁이 지속됐다. 그 과정에서 맥아더는 만주에 대한 ‘북폭’(원자탄)을 주장했다. 그러나 3차대전을 우려한 우방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1951년 4월 10일 해임됐다.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맥아더가 해임되자 언론들은 트루먼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맥아더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맥아더를 ‘신의 재능을 지닌 영웅’이라고까지 칭송했다. 1951년 4월 19일 양원 합동회의 연설을 통해 트루먼의 대아시아정책을 비난하고 “노병은 절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을 때 엄청난 찬사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맥아더는 참 운이 좋았다. 일본에 원자탄 2발을 투하하여 항복을 받아낸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 미국은 원자탄 2개 밖에 없었다. 이런 정보를 일본이 알았다면 전쟁은 오래갔을 것이다. 또한 그는 기도하는 장군이었다. 전쟁 중에도 매일 4번씩 기도했고 상황이 안 좋을 때는 더 많이 기도했다. 일본의 항복을 받고 2차대전을 종식시킨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베트남 선교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