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언더우드 2세와 6.25 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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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더우드가(家)의 한국 선교

언더우드 가문은 1885년부터 2004년까지 4대째 한국 선교를 이어갔다. 언더우드 1세(원두우: 1859-1916)는 1885년 한국에 처음 상주하는 목사선교사로 들어와서 1916년 서거하기까지 “한국에 천국을 건설해 간” 한국과 한국 선교사에 빛나는 불후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아들 언더우드 2세(원한경: 1890-1951)는 총각, 처녀로 각각 한국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부부로 맺어진 언더우드와 릴리아스 호튼 의료선교사의 독자이다. 그의 한국 이름 원한경은 ‘한성[당시 서울]의 기쁨’이라는 뜻으로 31세에 선교지 한국 서울에서 아들을 얻은 언더우드 1세의 기쁨과 한국 사랑의 마음이 오롯이 배어있다. 그는 부친이 세운 조선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의 교수, 부교장, 교장을 역임했고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해방 후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연희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지내면서 해방된 한국의 건국을 도왔다. 언더우드 3세(원일한: 1917-2004)는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추방되기 한 해 전 동 대학의 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6.25전쟁 당시 통역장교 등으로 복무했고 이후 연세대학교 이사, 감사, 영문과 교수로 봉직했다. 언더우드 4세(원한광 : 1943- )는 연세대학교 교수와 한미교육위원단 단장으로 봉직했으며 2004년 말 한국을 떠나갔다.

2. 언더우드 2세의 한국 선교와 공산주의

최근세의 세계 역사 중 가장 획기가 되는 사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필자는 1917년 발발한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 즉 공산혁명이 그것이다. 공산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중국, 몽골, 동남아, 유럽, 북한까지 확대되었고, 공산주의의 확대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서독 등 개신교국 벨트에 의해 차단되자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그람시의 착안으로 동성애, 이슬람, 차별금지의 문화막시즘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 유럽과 심지어 미국까지도 하나님이 세우신 3대 공동체-가정, 교회, 국가-를 무너뜨렸고 또 무너뜨리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이 문화막시즘-동성애, 이슬람, 차별금지-의 파괴적 공격 앞에 노출되어 있으며 더구나 북한 공산주의가 낳은 주체사상[주사파]의 교묘한 침투와 체제 허물기에 직면하고 있다.

언더우드가의 한국 선교를 최근세 역사의 쟁점인 공산주의 문제와 맞추어 시기를 구분한다면, 언더우드 2세의 한국 선교가 이와 가장 맹렬하게 시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하는 등 한국에 천국을 건설해간 언더우드 1세는 1916년 서거했다. 언더우드 1세가 서거하고 1년 뒤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무렵 언더우드 2세는 부친 서거 후 교장 에비슨을 도와 조선기독교대학에서 심혈을 기울여 일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언더우드 2세는 대한민국 건국 후 북한 게릴라가 쏜 흉탄에 부인을 잃었고 그 자신도 이때 얻은 심장병이 도져 1.4 후퇴 후 부산에서 급서했다.

류금주 목사

<청교도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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