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향기] 한국기독교학술상 수상한 이광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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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꺼지지 않는 복음의 발전소로 남아야”

한국교회의 선교신학과 선교사의 모퉁잇돌(Cornerstone) 이광순 박사

(재)한국기독교학술원(이사장 이흥순 장로, 원장 이종윤 목사, 이하 학술원)은 5월 23일 제12회 한국기독교학술상을 더라이트미션(The Light Mission) 이사장 이광순 박사에게 시상했다. 학술원은 시상 이유에 대해 “이광순 박사는 선교신학과 선교사 운동에 주춧돌이었으며, 선교 학자로, 교육자로 다년간 선교신학과 선교 활동에 신행일치의 삶을 살면서 선교 활동을 통한 후학 배양에 전심하였다”라고 밝혔다.
“한국교회의 선교신학과 선교사의 모퉁잇돌(Cornerstone)”로 불리는 이광순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신학 박사이자 전 세계에서 여성 1호 선교신학자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내가 선교신학자 1번이 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저 나는 한국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나라에 선교학과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던 것뿐이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 선교대학원을 만들었고 우리 교단 총회가 당시 선교사를 348명 보내기로 결의했는데 내가 500명을 보내겠다고 총회장님께 말씀드리고는 약 700명 선교사를 훈련시켜 파송시켰지. 선교 사역한지 30~40년 정도 된 선교사들은 거의 다 그때 내가 훈련시킨 선교사들이에요.”
이광순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미국 Southeastern Bible College,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 교육학 학사, 석사 학위를 받고 Fuller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선교신학회 학회지 ‘선교신학’과 장신대 세계선교연구원 학술지 ‘선교와 신학’을 창간했고 국내 신학계에서 처음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가 됐다. 또 ‘미션 아카데미’ 출판사를 설립 운영해 <선교와 현장> <선교신학연구 시리즈> 등 50여 권의 선교 관련 책을 출판했다. 장신대 세계선교연구원 원장, 총회 위탁 선교사 파송 훈련, 외국인 교회 지도자 교육과 생활 지도를 맡아 활동했다. 국내 최초로 세계선교대학원을 교육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아 초대 원장을 역임했으며, 장신대 대학원장, 총장 직무 대리로 섬기기도 했다. 한국선교신학회를 설립해 회장을 맡았고, 한국 및 아시아 로잔 운동 의장으로도 일했다.
은퇴 후에도 목사로, 선교학자로, 교육자로 다년간 선교 신학과 선교 활동에 헌신하며, 한국에서 유일한 선교 전문 주안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 총장을 맡았고,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 인근에 위치해 있는 허드슨테일러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또 자신의 재산을 모두 들여 더라이트미션(The Light Mission) 법인체를 설립한 이광순 박사는 이사장을 맡아 해마다 선교사상을 수여하고, 선교사 자손들에게는 선교장학금을, 각 나라마다 그 나라 선교 인재를 발굴해 모퉁잇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여든을 앞둔 지금까지도 선교를 위해 뛰고 있다.

이 아이는 하나님 영광 위해 쓰임 받을 것
서울 광나루 장로회신학대학교 바로 옆에 있는 빌라에 40년 가까이 거주 중인 이광순 박사. 그의 오랜 보금자리에는 곳곳에 서적과 연구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강의나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에는 이곳에서 연구와 집필활동에 집중하고 있을 이 박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밝은 얼굴과 힘 있는 목소리 때문인지 곱게 센 은빛 머리카락은 78세 이광순 박사의 얼굴을 더욱 환하게 비추는 후광 같다.
‘여중호걸(女中豪傑)’. 이광순 박사를 만나면 떠오르는 단어다. 이광순 박사가 태어나던 날, 그를 받았던 숙모 할머니는 찬송가를 부르시며 ‘이 아이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을 것’이라고 기도하셨다고.
“숙모 할머니가 양반집 여인이셨는데, 그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실 때면 멋진 모자를 쓰시고 굉장한 옷을 입고 나타나셨던 것이 우리 언니 기억에 있다고 해요. 숙모 할머니가 당시 전도부인이셨어요. 우리 언니가 나 태어나던 날도 기억하는데 내게 말해주기를, 숙모 할머니가 오셔서 갓 태어난 나를 받아 물을 받아 놓은 커다란 함지에 갓난아기를 집어넣어 씻기셨대요. 그때 어린 언니는 아기를 함지에 집어넣는 광경이 무척 놀랐던 모양이야. 숙모 할머니는 나를 씻기고 수건으로 닦이고 눕히면서 연신 찬송하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 영광을 돌리세. 영원 무궁하기까지 영광을 돌리세’라고 부르시면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고 해요.”
이광순 박사의 제일 큰오빠는 6·25전쟁이 터지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나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 충격으로 부모님은 이후 자녀들에게 더 이상 공부를 시키지 않기로 했다.
“전쟁이 나자 아버지는 큰오빠가 군대에 나가지 않도록 어떻게 수를 써서 자꾸 빼내셨던 모양이에요. 어느 날 오빠가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를, 글도 모르는 아이들을 군대에 보내실 거냐고, 나는 군대에 들어가 나라를 지키겠노라고. 그리곤 학업 중이던 우리 오빠가 소대장으로 군에 들어갔어요. 그때 내가 비록 어렸지만 우리 오빠가 ‘나라를 위하여’라고 외치던 것이 기억에 나요. 우리 오빠가 굉장한 애국자 중에 애국자였어요. 그러면서도 내게는 짓궂어서 ‘광순아 내가 오다가 저 다리 밑에서 네 엄마를 봤다’라며 놀리기도 했지요. 큰오빠가 군대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자 아버지께서는 ‘공부시켜봤자 제 발로 나가서는 죽어 돌아온다’ 하시면서 둘째 오빠부터는 공부 안 시키겠다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내 위에 오빠와 언니 둘은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요. 나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 동네에서 내가 처음 대학에 갔어요. 여자 중에서는 그 지역에서 내가 처음일 거예요. 영남신학교 63학번.”
이광순 박사가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엘 가자 그 뒤로 모든 동생과 조카들까지 모두 대학 졸업자가 됐다. 집안에서 첫 박사 학위 취득자였던 이광순 박사의 뒤를 이어 이제 곧 열 번째 박사 탄생을 앞두고 있다.
어려서부터 앞장서기를 두려워 않고 독립심도 강했던 이광순 박사는 ‘거듭났던 경험’도 또렷이 기억한다며 소개했다.
“내가 7살 때, 정확하게는 5살 때예요. 당시 아이가 태어나면 죽고, 자꾸 죽으니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2년 늦게 하셨어요. 큰언니부터 우리 형제자매들이 호적에 두 살씩 나이가 적게 등록됐어요. 우리집 뒤쪽 울타리에 좋은 나무들을 심어 놓았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 나무들을 베어다 예배당 짓는데 쓰셨던 기억도 나네요. 교회 종탑도 세우시고. 아무튼 내가 7살 때, 로일연(릴리안 로스, Lilian Ross) 미국인 선교사가 어린이 부흥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도 왔어요. 그때 나는 외국인도 처음 본데다 그분이 서툴지만 한국말로 성경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하셔서 일주일 동안 나와 같은 아이들은 그만 홀딱 빠졌지. 옆에서 통역을 해주시는 여자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나 이제 잘하겠습니다, 하는 결단기도 해볼 사람?’하고 물으시길래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어요. 내가 큰 소리로 기도를 했더니 로일연 선교사님이 무척 좋아하셨지요. 그리곤 나를 칭찬해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본 어게인’ 하셨어.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듭났다는 거였어요. 다시 태어났다고.”
초등학교 등하굣길에는 항상 예배당에 들렀다. 7살 때부터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나갔다. 길에서 주운 몽당 색연필로 달력을 만들어 매일 표시해가며 새벽기도를 나갔다. 철야기도도 열심히 나갔는데 목청 높여 기도하던 버릇 때문에 이후로 목소리가 좀 굵어졌다. 11살에는 경주군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어느 날 학교에 시찰을 나온 교육감 앞에서 교장선생님이 어린 이 박사를 불러 백일장에서 상 탄 글을 칭찬하기도 했다.
“백일장에서 썼던 글 내용이 뭐냐 하면 나의 장래에 대해서 쓴 건데, 내 나이 20대, 30대, 40대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쓴 거였어요. 나의 인생 계획서라고 할까. 그런데 돌아보니 그때 내가 쓴 계획대로 살고 있지 않겠어요. 정말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갔지만, 지금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고 물어요. 나는 다른 사람하고 경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늘 나의 경쟁상대는 오직 나였어요.”
이광순 박사는 미국 유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약속을 했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만 해주신다면 학비와 생활비는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가난했지만 한 번도 가난이 부끄러웠던 적 없었다. 오히려 가난은 이 박사에게 감사를 고백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영락교회 전도사로 부임받아 갈 때 가방이 없어서 보따리 짐을 싸서 갔어요. 심방을 갈 때도 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녔더니 어느 날 심방부에서 내게 가방을 하나 선물로 사주더라고요. 하하. 돈이 없어서 고생은 했지만 돈까지 있었으면 얼마나 교만했을까요. 내가 시골 출신이라 ‘시골뜨기’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내가 가난하게 살았지만 한 번도 가난으로 기가 죽은 적이 없었어요. 난 내가 시골 출신이라 감사했고, 가난했기 때문에 감사했고, 또 여자이기 때문에 감사했어요.”
여전히 선교를 향해 식지 않은 열정을 품고 있는 이광순 박사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 “unquenchable power house(끌 수 없는 발전소)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교회는 절대 누구도 끌 수 없는, 꺼지지 않는 파워 하우스, 복음의 발전소로 남아야 해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가뭄이 와도 홍수가 터져도 끊임없이 마실 물을 제공해주는 생명 샘터와 같이, 한국교회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해요.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이 세워져 있습니까. 만약 그 많은 교회가 전부 다 파워 하우스가 된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면 코로나 정도는 시시하고 아무 것도 아니지요. 코로나는 지나가는 거니까, 지나가는 것 때문에 우왕좌왕할 필요 전혀 없어요. 이삭이 간 곳마다 우물을 팠듯이 그렇게 물이 계속 솟아나는 물줄기를 만들어 내보자고요. 외적인 환경이나 조류에 흔들리거나 휩쓸리지 말고 우리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해요. 한국교회의 뿌리가 어디인가. 그 뿌리를 다시 찾아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살아날 겁니다. 희망이 있어요.”
이광순 박사는 고구마에 작은 싹이 보여 그릇에 꽂아 놓았더니 무럭무럭 자라 잎을 낸 화분을 자랑했다. 일주일에 한번만 물을 챙겨준다고. 성령의 물만 채워진다면 한국교회도 이렇듯 자랄 수밖에 없다고, 우리에겐 흔들리지 않는 뿌리와 꺼지지 않는 생명력이 있으니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 힘있게 말했다.
“어차피 인간에게는 사실 가능한 게 없어요. 하지만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한 게 없습니다. 나는 마리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는데 ‘for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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